작년에 따뜻한 판타지 소설인 [숲과 별이 만날 때]를 재밌게 읽었다. 비슷한 느낌인 [벼랑 위의 집]도 기대를 많이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독창성도 없고 내용의 개연성이 떨어져 실망스러웠다.
소설의 배경은 마법 생명체가 존재하는 현대 사회이다. 인간 중심 사회이기에 마법 생명체는 은연중에 차별을 받는다. 정부는 마법 생물을 규제하고 관리한다. 주인공 라이너스는 '마법 관리부서'에서 마법 아이를 양육하는 고아원을 감사하는 조사원이다. 어느 날 경영진이 평범한 사원인 라이너스를 호출하여 특별한 마법 아이들이 사는 마르시아스 고아원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고아원에는 악마, 놈, 정령, 와이번, 수인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족의 아이가 원장 아서, 정령 채플 화이트와 살고 있었다. 충격적인 아이들의 정체에 주인공은 겁을 집어 먹지만 아서의 인도 아래 아이들과 유대감을 쌓는다. 결국 편견 없이 보면 마법 아이들도 그저 '아이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고아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회사에 제출한다. 그리고 고아원으로 돌아가 그 사이 연인이 된 아서와 함께 행복하게 산다.
소설 속 이야기는 매우 익숙하다. 나처럼 판타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모두 아는 'X-MEN' 프랜차이즈와 설정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아이들, 아이들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지도자, 이들을 두려워하고 적대시하는 인간사회까지 모든 점이 일치한다. 안타깝게도, [벼랑 위의 집]의 등장인물은 'X-MEN'의 인물들보다 평면적이고 내용 또한 'X-MEN' 보다 일차원적이다. 예를 들어, 'X-MEN' 속의 악역은 자신만의 충분한 서사를 갖고 있고 뮤턴트(특수 능력자)들을 괴롭히는 이유가 있다. 역으로 인간을 제거하려는 안티 히어로 매그니토는 인간과 공존을 꿈꾸는 'X-MEN'일행과 화합-갈등하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반면, [벼랑 위의 집]의 악역 격인 경영진은 동기와 의도가 불분명하며 고아원을 적대시하는 마을 사람들은 단순히 편견에 사로잡힌 무지렁이들로 묘사된다.
읽는 동안 계속 엑스맨 생각이 났다
이야기의 개연성도 부족하다. 왜 경영진은 굳이 라이너스를 선택하였는가? 꼭 대면까지 하면서 마르시아스 고아원 조사 임무를 맡겨야 했는가? 차라리 사무적으로 갑작스럽게 편지로 발령 통보를 받는 게 더 관료적인 '마법 관리국' 분위기와 맞지 않을까? 파르나서스 원장과 채플 화이트는 왜 초반부터 라이너스에 호감을 보이는가? 심지어 원장 아서는 과거 라이너스와 똑같은 업무로 고아원에 온 조사원에게 마음을 열었다 배신을 당했는데도 주인공에게 호의적이다. 고아원 운영에 회의적이던 경영진이 '고아원 유지' 의견이 담긴 주인공의 보고서를 맥락 없이 받아들이는 점도 황당하다.
저자 약력을 살펴보자. TJ 클룬은 지속적으로 소수자의 권리를 주제로 소설을 써 왔다. 주제의식이 강한 작가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내용만 강조하다 보니 소설의 만듦새가 엉망이 되었다. "무조건 게이 커플이 등장해야 하고 소수자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다 못 배운 사람들이야!"라고 외치는 작가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비슷한 주제를 가진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던 이유는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들에 약간의 상상력을 더했기 때문이다. [벼랑 위의 집]은 안 그래도 비현실적인 판타지 소설인데, 인물들마저 개연성 없이 행동하니 소설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파르나서스 원장이나 루시처럼 개인이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규제를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가 총기 규제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춘기 루시(악마의 아들)가 좋아하는 여자아이한테 고백했다 거절당한 후 마음이 상했다 가정하자. 그때 순간적인 감정으로 힘을 통제하지 못해 여자아이가 사는 마을을 다 태워버리면 저자 TJ클룬이 책임져 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