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책을 향한 욕구는 표지의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림의 특별함은 고개를 돌린 인물 때문일까?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아도 모델은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다고 느껴졌다. 대체로 노란빛이고 모델의 피부에만 약간 혈색이 돈다. 여백은 금빛으로 보이는 카키색,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빛이 사라지는 곳. 그런 세부요소가 없었다면 이렇게 끌리지 않았겠지.
캐럴라인 냅이라는 작가에 대한 소문과 추천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표지가 탐났을 뿐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어느 정도로 욕망해야 할지 몰랐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나면 <욕구들>이라는 책이 보인다. 예상했던 '욕구들'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이제 <명랑한 은둔자>의 표지를 통해 입력한 (새침한 소녀의) 이미지와는 다른 각도의 호기심이 생겼다. 이 책은 2023년에 가장 먼저 읽으려고 미리 계획해둔, 새로운 작가의 첫 번째 책이다. 나에게 새로운, 나에게 첫번째라 의미가 있었다.
표지 디자인의 섬세한 설득력은 놀랍게도 본문의 그것과 일치했다! 캐럴라인 냅은 자신의 내향적인 성격을 진솔하게 표현할 줄 안다. 내향인에 대한 타인의 감정을 최대한 짐작해보고 그것에 대해 '타인'과 공감할 수 있을만큼 그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보는 메타인지를 갖추었다.
이 책을 읽다가 계획에 없던, 다중자아에 대한 '아바타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고 서평이 아닌 무언가를 쓰게 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내향인이든 내향성을 크게 품은 섬세한 외향인이든. 게다가 제목부터 내 안의 모순과 마주하라고 부드럽게 설득하는 이 책을 손에 쥔 이상, 어떻게 그 모순을 외면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에세이를 부르는 에세이'라 부른다. 냅의 글은 친구의 편지처럼 독자의 '답장' 욕구를 자극한다.
냅이 일깨운 자아성찰의 욕구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한편, 칼럼을 모아서 사후 발행한 이 책은 언제든 조금씩 읽을 수 있고 그래서 빨리빨리 읽어내진 않았다. 한번에 한 편만 읽어도 충만한 기분이 드는 동시에 책 전체로 보면 중복되는 내용도 많다. 번역 과정에서 덜어냈다고 하는데도. 이건 그녀의 의도가 아니니까 넘어가자. 칼럼이란 장르성 때문이다.
미국 (엘리트) 여성의 에세이는 국내에서 인기있는 부류가 아니다. 하지만 냅의 본질적인 사유가 담긴 이 책은 전세계의, 한국의 '82년생 김지영'들이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었던 그 무언가를 말하게 한다. 그래서 소리없이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이 책을 정말 좋아할 것 같은 사람은 성격상 정말 친한 이너써클에만 알렸을텐데.) 대대적으로 마케팅을 하지도 않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번역서, 철학적이고 중수필에 가깝지만, 여성들 사이에서 (정말 한명 한명을 타고 넘어서) 엄청나게 바이럴이 되었다.
내게는 약간 비껴갔다. 여성이기에 크게 공감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답장쓰듯 발화하는 동기는 공감이 아니었다. 다른 성격, 지독하게 예민한 외향성을 가진 다른 여성의 자기고백이었다. (물론 냅도 자신보다 덜 사회화가 된, 더 내향적인 사람에게 느꼈다고 고백한 그런 부분이다.) 거북이처럼 숨어드는 냅과 같은, 특히 여성이 그럴 경우에, 끄집어내고 싶어 죽겠는데, 차마 그러지 못하는 성격.
이러다 내가 죽지.
만약 그 상대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타인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고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그 상대가 자신이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는지 혹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불편함이나 과묵함이 그에게는 자신이 지루해서 그러는 거라고 보일 수 있다. -35p, 수줍음의 옹호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 즐길 때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다.
-48p, 명랑한 은둔자
어떤 괴로움에 대해서든 손쉬운 해법이 있으리라고 여기고 찾아보는 것은 20세기 고유의 시각이자 소비자 문화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우리 주변의 다이어트 워크숍이나 성형외과만큼 널리 퍼진 것이 되었다. -79p,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사랑받고 싶을 때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애정이란 내가 얻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사랑받으려면 시험을 통과하고, 지적 후프를 뛰어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여겼어. 그러니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깊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야. 이것이 네가 내게 준 선물이란다. -94p, 조이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맨 처음 알게 되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30p, 회복으로 가는 먼 길에 대하여
한마디로, 여자로 자랄 때는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부담은 허리가 휘도록 지면서도 매력적인 데 따르는 즐거움은 거의 누리지 못한다.
-239p,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자들의 태도
그래서 남자들이 내게 보이는 지적 존중과 성적 관심을 하나로 엉킨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헷갈린 상태에서 어떻게 "싫다"고 말하겠는가?
-250p, 권력과 섹슈얼리티의 오용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이상에 견주어 측정하면서 살다 보면, 어느새 많은 단순한 감정들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인간성에서 큰 부분을 잃게 된다. -289p, 그냥 보통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