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공부하고 쓰는 삶을 다시 한번(?) 결심한 약 십년 전의 어느 날 이후로도 정말 부지런하게 읽고 쓰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른 것을 할 수 없게 되어서야 먼 길을 돌아 책상 앞에 앉게 된 어지러운 나의 발자국을 보다 그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했던, 선생님이지만 선생님이라기엔 너무 젊은 선배님을 종종 떠올렸다. 리뷰와 에세이에서 2000년대를 회상할 때 자주 등장했던 김애란 작가는 시나리오와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이십대의 내가 즐겨 읽고 참고했던 젊은 작가였다.
지난 이십년 동안 '젊은'이라는 기준이 계속 수직상승했기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젊은 작가다. 여전히 너무도 젊은데, 여전히 활동하고 계셔서 너무도 든든하고 그녀의 시간들만큼 내게도 보이지 않는 경험이 쌓였을 생각을 하면 조급해지면서도 힘이 난다.
<달려라, 아비>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까지 왕성하게 읽고 까먹었기 때문에, 게다가 책의 소재(所在)도 더이상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디가서 김애란을 읽었다고 자랑하기 부끄럽다. 어떤 책이 가장 좋았는지도 멀어서 흐릿한 기억, 그럼에도 그 책들과 함께한 시간이 바삭바삭하면서도 따뜻했던 기억.
그런 그녀의 산문을 발견한 어느 책방에서 단숨에 짧은 글 한편을 흡입했다. 이 책의 첫 글 '나를 키운 팔할은'이다. 그녀가 나를 키우던 그때도 그 진정성에 반했던 것 같다. 다른 작가들보다 유독 '젊어서'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다. 허세는 허세라고 말하는 진심에서 그녀가 가진 가장 힘있는 무기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 이번 책에서 그녀가 건너온 삼십대, 그간의 못 들은 이야기를 논픽션으로 만나보았다.
어찌하여 그녀는 그토록 겸손하고 소탈한지, 쓰고 읽는 사람으로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지, 맨정신으로 통과할 수 없었던 우리의 2010년대를 되새겨본다. 지우개로 아무리 지워도 패인 자국을 남기는 연필처럼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본다.
우리는 늘 우리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것이 노련하게 전달되길 원한다. 그러니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이는 촌스럽거나 순진하거나 다급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리라. -88p
만일 어느 작품 속 인물이 평편하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표현됐다면, 부조리한데 그럴 법하고, 전적으로 지지할 순 없으되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게 그려졌다면, 그건 그 작가가 유능하기보다(혹은 그 능력에 앞서) 겸손하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라고 믿어서다. -176p
모르면서 알 것 같은 오래된 예감. 고대인의 무의식과 꿈 언저리에 살짝 발을 적신 현대인의 떨림. 이런 것을 사람들은 '영감'이라 부르든가. -202p
가끔은 책 위에 남은 무수한 검은 선이 아이스링크 얼음판에 새겨진 스케이트 날 자국처럼 보인다. 정신적 운동이랄까. 연습의 흔적. -240p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269p
만일 문학에 전통이란 게 있다면 그중 우리가 이어나갈 게 있다면 그건 단순히 소재나 형식이기 전에 사람과 이 세계를 대하는 어떤 태도 혹은 마음이지 않을까. -292p
눈물조차 사치였던 또 한 시절을 지나 이제는 책과 함께라는 핑계로 많이 웃고, 많이 운다. 이 책의 3부를 밖에서 읽었기에 울다 탈진하는 대신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감정을 되찾은 건 다행이지만 감상에 젖고 싶지 않다. 내 슬픔이나, 현대인의 고독으로 치부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이 귀찮은 사람들에게 지지 않을 무기로 자국을 내야한다. 색이 바래도 골이 남아있는 연필 자국을 내야한다.
...그렇긴 하지만 저자의 다정함에 많이 위로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