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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Sep 29. 2023

드라마에 대한 드라마적 복수

황모과 <클락워크 도깨비>

누군가를 외롭게 남겨두고 새로운 미래로 혼자만 달려갈  없달까. 기왕이면 모두가 같이 가볼  있는 곳으로, 작은 보폭으로나마 함께 가보고 싶었다는 말로 장르적 상상력에 능통하지 못한 편협함을 변명해 본다. -104p, 작가의 




​깊은 산 속 홀아비의 외동딸과 조선의 마지막 도깨비는 세상의 분류에 속하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도깨비가 더이상 사람들을 놀래키지 못할 그 즈음, 한반도에 상륙한 산업혁명을 마주한 연화는 첨단기술의 최전선에서 발명가의 재능을 발견하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오명도 뒤집어쓴다.


연화와 갑이, 연화와 진홍은 모두의 외면을 함께 견뎌내지만 이 서사의 목적은 판타지에 의한 역사의 재구성은 아니기에 다만 저항과 고립이 있을 뿐 전복은 없다. 만약 역사적 사실주의나 논픽션에 눈물을 많이 뺏기는 체질이라면 작가의 말 등을 통해서 이 점을 예상하고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작고 농축된 책을 통해 짧은 시간 동안 느껴볼  있는 약간의 통쾌함은 있다. 세상의 시선이나 소문 따위는 흘려버리는 아버지와 , 겁없이 도깨비를 데리고 남장 노동자로 한성을 누비는 연화, 그런 연화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진홍, 자기만의 길을 가지만 결국 연화에게 돌아오는 갑이는 이미 벌어진 역사 속에서만 재현되는 판타지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작은 희망이 된다. 충분히 복원되지 못한 소외된 존재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위로한다.




'온전하지 못한 년'들은 차출에서 제외됐다. 명령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판정받은 셈이었다. 불려가지 않은 대신 형벌 같은 빈곤이 기다렸다. 굴의 굴속엔 먹을 게 없었다. -79p


연화는 홀로 남았다.

홀로 어둠 속에 머물며 깨달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 이도 저도 아닌 존재, 자기 자리가 없다면 차라리 인간이라 불리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던 인간들이 바로 도깨비들이었다는 것을. -92p




SF라는 신선한 다양성을 적용해 역사와 역사적 존재들을 폭넓게 상상해보는 작업을 하는 황모과 작가의 책 두 권 중에서 얇은 책을 먼저 읽었다. 짧은 시간에 완독했지만 그만큼 여운도 짙고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 책은 이미 사 놓은 책이 될지, 새로 살 책이 될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전해야겠다.


어린 시절 (20세기에 태어난 숙명으로) 일제 강점기가 배경인 책과 드라마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속상한 마음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 책을 찢었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에 대한 드라마적 복수라면 판타지나 첩보물을 통해 탐관오리와 전쟁범죄자들이 처벌받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는 것이었다.


좀비나 도깨비 같은 기이한 존재들은 정의와 직결되지 않지만, 때로는 선을 넘지 못하는 민간인을 대신해 악인을 처단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어디까지나 드라마적 복수라는 차원에서, 대리만족이기에 그런 세계관을 설계함으로써 기득권자들이 업보에 시달리는 모습을 가상현실 속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소외된 존재라고 타자화되는,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것들의 활약을 보고 싶었다. 그런 작품을 (특히 한국인의 관점에서) 상상하는  많은 시도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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