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지구를 순회한 끝에 산책덕심 발견
스웨덴어는 30년은 안 걸리겠지, 로 영어 자랑을 시작한 지 만 3년이 넘었다. 스웨덴어는 커녕, 초급 경력만 계속 늘고 있는 독일어나 스페인어는 무한 제자리 걸음인데 그 와중에 프랑스어가 시선강탈을 해서 영어 빼고 다 하향 평준화된 것 같다. 그럼에도 어디에서 스웨덴어 교재를 구해야 할지 알게 됐고(근데 어디더라?) 그 엄청난 정보를 얻기 직전, 프랑스어 원서도 종이책으로 구입했다. 실수로 갖게 된 프랑스어판 <제인 에어> 전자책도 있는데, 프랑스 작가 종이책 한 권은 기념품이라고 하자. 사놓고 안 읽는 영어책은 수십권이다. 국내서도 책등만으로 영감을 주는데 영어책이야 말할 것도 없지.
최근에는 자고 일어나서 자코메티가 생각났고, 작년에는 올랭피아, 재작년에는 모킹제이가 생각났다. 이 키워드는 책등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 책사냥의 정점을 찍은 지지난주에는 <헝거게임> 원서도 구입했고 이번주에는 드디어 자코메티 작품 사진을 맥락없이 올렸다. 그리고 오늘은 캐피톨이다. 더 잘 나온, 더 최근의, 더 어려보이는(좀 그만 어려보이고 싶어도 늙어보이면 안 되는? 나이가 돼서 진퇴양난이다.) 사진을 골라두었지만, 아 맞다!
잊혀진 사진더미가 있었다. 후루룩 넘어갔지만 당시에 본 사람이 별로 없는 사진들. 다시 보정하면서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전날 그린 눈썹이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분명 입술 상태를 보면 리터치를 안 한 지 한참 됐다. 캐피톨에 도착한 시점은 2019년 10월 3일 목요일 아침 8시, 뉴욕발 밤 12시 메가버스는 3시간만에 워싱턴 중앙역에 도착해서 눈먼 시간이 왕창 생겼지만, 잠을 잘 수 없었기에 '아인슈타인'이라는 카페에서 지난 3주간의 가계부를 작성했다.
이 얘기는 전에도 한 적이 있는데 어느 대목에서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어서 사진 촬영시간과 함께 요일 확인차 '장부'를 열었더니...여기서 또 아인슈타인이 나와서 빵터졌다. 운명인가 봄.
그러니까 지금 워싱턴 셀피를 소환한 이유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전편에 등장한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다시 나올 줄 몰랐다. 물론 오늘, 그러니까 6월 30일에는 115년 전 6월 30일에 있었던 퉁구스카 대폭발에 대해 처음 알게됐다. 그 전에 뉴턴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고, 그 전에 케플러에 대해 '왜 이렇게 아는 게 없지?'라는 자문이 들어서 베이직한 다른 책을 꺼내보니 그 부분만 안 읽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읽어봐도 케플러는 그냥 '그 중의 한 사람' 정도로만 언급된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아는 게 없'는지는 알게 됐다. 배운 적이 없고, 배우려고 한 적도 없다. 천문학 관련 드라마, 영화를 많이 봐서 좀 안다고 착각했을 뿐, 22년 전 지구과학 수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날씨'였고 (여전히 시카고 9월 날씨 전문 블로거) 가장 난처했던 부분은 '외행성의 궤도'였다.
모종의 이유로 수학을 거의 독학했는데, 그래서 수학으로 수렴하는 천문학에 살짝 겁을 먹었다. 그럼에도 화학을 제외한 나머지 과학들은 성적이 최우수(전교 3등 이내)였다. 화학이야말로 무한히 수학에 가까워지는 과목이었는데 투입한 노력이 있어서 우수하지 못하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덕분에 대입 면접과 그 이후를 견뎌냈고, 결국 영어도 과학에게 신세를 졌다. 과학적인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단어들을 영어로 접한다면 과학, 영어 둘다 포기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둘 중 하나라도 잡고 있으면 서로의 버팀목이 된다. 책덕후가 책수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3년만에 영어를 완성하게 해준 것은 과학이었다. 그리고 3년이 더 지났다.
프랑스어는 옆에서 누가 읽어주면 따라 읽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와중에 나름의 조사를 거쳐 프랑스어 지명과 인명이 포함된 프랑스가 배경인 소설을 쓰고 있다. 인명은 주로 예술가 이름을 참고했지만 드라마, 소설의 등장인물도 많다. 영어문화권보다도 스페인 저쪽으로 가면 이름이 더 흔해지는데 너무 흔한 이름 빼고 적당히 흔한 이름만 골라도 하루에 몇 명을 만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작년에 알게 된 플라뇌즈라는 보통명사, 그러니까 보들레르가 브랜딩한 플라뇌르, 를 로런 엘킨이 리-브랜딩한 플라뇌즈만큼 임팩트 강한 이름은 없을 것이다.
엘킨을 정독하기 전부터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을 '산책덕후 영국언니'라 부르며 플라뇌즈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번역이 유행을 타기 전에(!) 내 필명을 '산책덕후 한국언니'로 지었다. 그렇다! 평생 잘 하고 좋아했던 단 하나의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겠는' 그 활동이 산책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