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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05. 2023

방랑하는 예술과 그 결실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흑사병이 창궐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죄없이 죽어 나가는 참상은 역사에서 형태를 달리하여 늘 반복되는 비극이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누명을 씌우고 속죄양으로 삼아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참상은 이 소설이 발표된 후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 집단의 야만적 만행을 예감케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소설은 1941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출판금지 처분을 받았다.

-482p, 작품 해설(임홍배)




​헤르만 헤세(1877-1962)가 53세 되던 해에 출간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부터 번역됐다. 어린 나는 소담출판사의 1993년판 <지와 사랑>을 왕성한 독서와 창작(?)을 했던 1997년에 읽고 까먹었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누군가와 이야기한 기억은 꽤 선명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인생책들은 유명하면서도 읽은 사람을 거의 못 봤기에 읽어 본 사람을 만났다는 게 더 신기했다. 천재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하다못해 난처한 사건사고로 가득한 이야기를 정말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같은 해에 구입했을, 민음사 헤세 전집 1 <데미안>의 1997년판 초판 1쇄는 그대로 재독하겠지만, <지와 사랑>은 임홍배 교수님의 번역본으로 새로 구입했다. 독서와 창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왕성하게 했던 2002년, 사전정보 없이 수강한 '문학과 사회' 수업에서 교수님을 뵌 적이 있다. 기말고사 대체 과제가 토마스 만을 리뷰하는 것이었던 덕분에 1학년 1학기를 아슬아슬하게 잘 건너갔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차이를 알게된 것은 덤.




이제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사랑 때문에 그녀에 대한 완벽한 소유를 단념하게까지 된 것이다.

-182p


우리가 예술가로서 어떤 형상을 창조하거나 사상가로서 어떤 법칙을 탐구하고 생각을 정리할 때면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거대한 죽음의 무도(舞蹈)로부터 구해 내려고 애쓴다. 우리 자신보다 더 오래 지속될 무엇인가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239p


자유를 포기하고, 위대한 체험들을 단념하고, 오직 단 한 번 그런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도 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266p


​배부른 시민들은 얼마나 게으르고, 막돼먹고, 까다롭게 구는가! 그들을 위해 날마다 얼마나 많은 돼지와 소들이 도살되고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강에서 낚이는가! -283p


​내가 집 안에서 보았던 것은 우리가 흑사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나와 자네 그리고 만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이야. -305p


골드문트라, 멋진 이름이군요. 당신의 입술이 정말 황금처럼 황홀한지 맛볼 거예요. -361p


​삶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일 때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 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372p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이 노래가 쓸모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노래에만 열중하는 법이지. 기도도 바로 그렇게 해야 하네. -430p


그런데도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462p




다시 만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내 기억보다 훨씬 섬세한 인물들이었다. 사랑과 부러움과 브로맨스와 견제는 물론, 마법에 걸린 듯한 입맞춤과 어머니를 끊임없이 부르짖는 골드문트의 방랑. 해설에 의하면 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헤세의 자기탐구를 말 그대로 예술로 승화한 작품이다.


사랑을 담아 심장을 차지한 여인을 조각하는 골드문트처럼, 헤세는 파란만장한 청춘을 거쳐 결실을 맺은 자신의 영혼을 한땀한땀 종이 위에 새겼다. 방랑욕(wanderlust), 삶의 흔적을 예술로 남기고자 하는 (번식 이상의) 창작욕은 골드문트가 여성이었다면 출산으로 해소할 수 있었을까? 이 역시 마더 컴플렉스와 연결되지만 진심으로 여성이 부러운 것 같진 않았다. 본인은 갇혀 살고 싶지 않고, 보호 받는 여성을 왜 (일반적인 인간과 다른 의미로) 존중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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