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베 디틀레우센 <청춘>, <의존>
그 말에 나는 상처를 받는다. 그러고는 화를 낸다. 내가 받아 온 모든 가정 교육에게, 내 무식함에게, 내가 쓰는 말들에게 전혀 세련되지도 못하고 교양도 없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가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그 모든 단어들에게. -청춘 206p
덴마크 작가 토베 디틀레우센의 코펜하겐 시절에 대한 논픽션으로 '암실문고'에 입문했다. (이전글: 코펜하겐 삼부작 중 <어린 시절> 리뷰 참고) 처음엔 암실문고에 이 책들밖에 없었고, 역자 서제인의 역서 목록을 따라가다 토베를 포함한 암실문고의 작가들을 알게 됐다고 봐야겠다. 비비언 고닉을 알게 되었듯, 토베를 시작으로 데리언 니 그리파와 마리아 투마킨(서제인의 역서들), 그리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신성아 작가가 선물한 암실문고의 다른 책), 심지어 발튀스(괴랄한 프랑스 화가)의 책까지 수집할 예정이다.
이전 리뷰에서 언급했듯 엘레나 페란테, 여기에 자동 소환되는 아니 에르노까지 딸려 나온다. (첫 번째 인용문 참고) 대도시, 그런데 변두리의 나르시시스트 엄마라니, 페란테나 에르노(의 고통이 전혀 가볍지는 않지만)와 다른 결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토베. <어린 시절>과 <청춘>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먼저 읽은 독자들이 킬포는 <의존>이라고 했는데, <의존>의 1부가 지루해서 리뷰 계획이 없었다면 한없이 늘어질 뻔했다. (1권과 2권 사이에도 공백이 있지만 2권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의존>의 반전은 말 그대로 반전이기에, 권마다 달라지는 작가소개 역시 '본문을 먼저 읽은 후 읽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여 눈앞에 두고도 세부사항을 읽지 않은 채로 본문에서 엉금엉금 헤엄치다가 토베가 작가-예술가-비범한 여성이 아니더라도, 아니, 아니라면 더더욱 삶이 복잡해지는 그 순간에 나타난 '그것'을 보고 그 후로 엔딩(?)까지 달려가게 되는데....
우리가 사는 구역 바깥에는 어머니가 두려워하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언제든 우리 둘이서 그 두려움을 함께 마주하게 되면 어머니는 나를 배신할 것이다. -어린 시절 27p
오빠의 어린 삶은 주문해 만든 것처럼 오빠의 성장과 조화를 이루며 넓어지는데, 내 어린 삶은 나와는 전혀 다른 어떤 소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 가면은 훨씬 더 멍청한 표정으로 변한다. -어린 시절 56p
세계는 내 어떤 부분도 인정해 주지 않고, 내가 모서리 하나를 겨우 붙잡을 때마다 내 손아귀를 슬쩍 빠져나간다. 사람들은 죽고, 그들 머리 위의 건물들은 헐려 나간다. -청춘 48p
어머니는 그저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철저히 무지할 뿐이다.
-청춘 70p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보다니 몹시 기쁘다. 불과 몇 년 전에는 그것 때문에 불행했었는데 말이다. -청춘 136p
이름 하나, 주소 한 줄.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청춘 169p
왜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 되고 싶어 해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데.
-의존, 81p
엄마 글 쓰고 있어.
나중에 우리 다 같이 산책 가자.
헬레는 의식을 행하듯 자기 인형에게 그렇게 되뇐다. -의존, 132p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은 누구에게도 절대 하지 않았다. 비밀을 어른에게 말하면 엉망이 되어 버리던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의존 157p
나는 다시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의존 193p
<어린 시절>과 <청춘>에 드러나듯 아주 일찍부터 시를 쓰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밀어붙인 토베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덴마크 문학계의 셀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외로 알려진 것은 사후에 번역된 회고록, <어린 시절>과 <청춘>이다. 삼부작으로 연결되지만 <의존>은 덴마크 내 발표 시기도 달랐고 영어판은 무려 2019년에 출간됐다.
자신의 삶을 연료 삼아 불타는 복숭아나무(이건 내 사주를 셀프해석한 문구이긴 하지만)처럼 뜨겁게 황홀하고 고독했던 토베의 코펜하겐 시절은 너무 큰 결핍과 그럼에도 주체할 수 없는 창작욕으로 가득해 괴로운 동시에 뿌듯하기도 하다. 이런 걸 쓸 수 있는 여자가, 20세기에 있었다니. 고통의 언어를 발견하려는 다양한 시도 중에서도 과히 앞섰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