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라스베리 타르트의 바닥은 아몬드 커스터드로 되어 있었다. 타르트에서는 과일, 구운 아몬드, 진한 크림 맛이 났다. 주위 환경과 어우러져 이 타르트야말로 서구 문명 사회 중상류층의 필수 요소인 것처럼 느껴졌다. 정묘하고도 세련된 최상의 위업들과 신경질적이고도 무감각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소비의 조합. -217p
초보 스릴러 덕후 시절에 만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3부작은 독서취향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그간의 터닝포인트 중 팬데믹을 능가하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 첫키스? 하지만 첫키스도 팬데믹도 '시대'를 가르지 못했다.
팬데믹이 초래한 비대면 어쩌구 저쩌구는 이미 <밀레니엄>이 제시한 새천년의 라이프스타일이었고, 우리는 리스베트 스타일의 고립된 재택근무를 좀더 빨리 받아들여야 했을 뿐이다. 리스베트를 만난 이후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비포와 에프터 밀레니엄의 기준은 2000년도 2002년(밀레니엄이 처음 등장한 해, 내가 성인이 된 해)도 아닌, 천재 해커 리스베트를 만난 2011년(밀레니엄 한국어판 개정판이 대대적인 마케팅을 했던 해)이다.
<밀레니엄>을 다섯 번 읽으면서 30대를 보냈다.
그로부터 또 12년쯤 흐른 2024년 2월, 눈이 쌓이던 몇번의 밤을 모아 마침내 스밀라를 만났다. 리스베트의 프로토타입인 그녀.
<스밀라>는 서점이나 책추천 콘텐츠가 아닌 지인을 통해, 설명없이 추천받았다. 나중에 마이 셰발, 페르 발뢰와 같이 '북유럽 스릴러'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전부터 영향력이 있던 작가 중 페터 회가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 <스밀라>는 덴마크를 비롯해 유럽 전역과 영어권을 휩쓸었다.
비포 밀레니엄인 90년대에 스밀라가 있었다면 새천년과 함께 스밀라의 후예인 리스베트가 등장했다. 스웨덴 소설 <밀레니엄>은 전세계를 휩쓸었지만 특히 덴마크에서 인기가 넘쳤다. 스밀라를 만나보니 그럴만했다. 캐릭터로는 리스베트가 의문의 1승. (스밀라에 스웨덴 국민캐릭터인 삐삐를 더한, 묘하게 더 '아시안' 룩을 선보이는 더 작은 여성, 리스베트!)
페터 회의 문장력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전달하는 현장감, 지적 유희는 신선하고 다채로우며 감탄을 자아낸다. 역자의 고뇌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날뛰는 심장 같은 문장은 번역을 뚫고 그림이 된다. 영상이 된다. 전문 무용수였던 페터 회는 춤으로 거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언어에 대한 욕구가 흘러 넘쳐 (책 속에서) 바다가 되었다.
이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춤만 춰도 행복한 사람으로 머물 수 없다.
이 이야기에서 내 마음에 들었던 점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손님들과 주인 모두가, 한 손님이 자기 방에서 평화와 고요를 얻을 수 있도록 무한한 수의 작업을 지극히 당연하게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독에 대한 커다란 존중의 표시다. -23p
내가 살아온 삶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창조해낸 것이었고 나는 내 인생이 달라지기를 원치 않는다. 기돈 크래머가 연주하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나는 운다. -83p
나는 문화적 정체성을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늘 혼잣말을 한다. 이런 말을 충분히 한 후에야, 어느 날 아침 굳건한 정체성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깨어나게 된다. 오늘처럼. 스밀라 야스페르센, 제멋대로 구는 그린란드인. -185p
외레순 카지노에서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조용하다. 격조 있는 장소. 스타일이 있고, 녹색 펠트 테이블에는 문화적 자극과 오락이 넘치는 곳. 새 친구를 사귀고 옛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 -311p
이 순간, 세탁 건조기 앞에서 나는 그 설명할 수 없는 내 청춘의 기억, 다시는 그 달콤함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기억에 매달려 있었다. 죽음이 나쁜 것은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놓기 때문이다. -415p
그의 의심은 나의 기회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올 때의 사냥꾼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썰매에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표정은 더 냉담해진다. 나는 낚시 여행 후에 어머니가 거짓으로 겸손한 척하던 것을 기억한다. 어머니가 쓰는 뻔한 속임수였지만, 모리츠는 분노가 폭발할 때마다 이 속임수를 꼭 집어내고는 했다. "20퍼센트 정도 낮춰서 행동하는 게 제일 좋아. 40퍼센트면 더 좋지." -538p
미문에 가려서 놓치는 복선이 많다. 인명, 지명에 인덱스로 표시해두면 좋다. (스릴러기도 하고, 덴마크어와 여러 곳의 그린란드어가 등장하기에 내가 쓰고 있는 취재물처럼 소중하게 다룰 것!) 여행보다는 탐험과 방랑에 가까운 승선이 플롯의 핵심이다. 액션과 심리 스릴러, 자연과 문명의 횡포가 그 어떤 영상보다도 선명하게 재생된다. 오로지 글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