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베 디틀레우센 <어린시절>
내 꿈은 한결같았다. 내 시들을 보여 주고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한 사람, 그 단 한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109p
토베 디틀레우센의 <청춘>을 발견하고 일단 집어왔는데 아무래도 <어린 시절>을 먼저 읽어야할 것 같았다. 번역가 서제인의 최신작을 업데이트하다가 발견한 이 시리즈는 종종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을 소환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폴리'를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는 동안 내가 떠올렸던 책은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였고, 한편으로는 나폴리 특유의 덥고 습한 기후가 <얼어붙은 여자>와는 조금 다른, 지중해의 열기를 전달한다고 느꼈다.
'코펜하겐'은 훨씬 추운 지역이다. 이글거리는 태양보다는 영롱한 백야에 가까운 신비와 흐릿함이 배어나오는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또는 애나 번스의 <밀크맨>이 사각사각 스친다. 이 두 작가는 부커상을 받았거나 후보에 오른 아일랜드 작가다.
더 오랫동안 품어온 스칸디나비아의 일명 '북유럽 스릴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을 엿보는 듯한 느낌도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이보다도 훨씬 척박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대신 그녀는 (어쩌면 저자의 상상력 한계나 전략적 설계에 의해) 스웨덴의 국민 캐릭터인 동시에 가장 글로벌한 캐릭터인 삐삐 롱스타킹을 닮았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 마거릿 애트우드에 의하면-혹은 출생연도에 따르면-삐삐의 모델이 된 캐릭터가 빨간머리 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앤의 후손 중에 삐삐가 있다, 뭐 그런.)
최근에 알게 된 핀란드 작가 마리아 투르트샤니노프의 <레드 수도원 연대기>는 그리스 지역을 모델삼은 배경으로 펼쳐지는 판타지 소설이지만 주인공의 어린시절 회상씬에 '춥고 배고픈' 이야기가 나온다. 북쪽 지역의 가난한 민중이 피해갈 수 없는 천재지변에는 '추위'와 '허기'가 반드시 포함된다. 혹한기가 필수는 아니어도 대체로 사계절이 매우 또렷한 한반도의 서사에 자주 등장하는 고난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배경이 지중해라면 추위나 그에 따른 식량부족의 등장 빈도가 낮다.
그래서일까. '나폴리 4부작'의 주요 갈등요소는 더위 먹은 마피아의 혈기왕성함이었는데 '코펜하겐 3부작'의 주요 갈등요소는 주정뱅이와 반(反)주정뱅이, 빠듯한 살림살이와 난방비다. 빈민에 가까운 노동계급 부모들, 게다가 20세기 초라면 양육방침도 부재하고 성역할은 전근대적이다. 병행독서 중인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에 등장하는 20세기 말의 고도화된 성차별과 아찔하게 대비된다.
토베의 시대에 태어난 노동계급 여성들은 '시인'이 될 수 없었다. 아마 남성(이를테면 토베의 오빠인 에드빈)이었어도, 꿈의 폭이 엄청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토베는 여성이라서 두어겹 더 껴입어야만 하는 겸손과 조신이라는 가식의 몸과 얼굴이 자꾸만 현실과 자아를 분리해대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어디로 방향을 틀더라도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맞부딪히고, 그 단단하고 뾰족한 모서리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는다. 그 일은 수많은 상처들이 우리를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 놓은 뒤에야 멈춘다. -53p
아버지는 내 맞은편에 앉아 아버지 특유의 온화하고 우울한 눈으로 자신 없는 표정을 짓는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아버지가 어색하게 묻는다. "밤의 여왕이요." 나는 잔인하게 대답한다. 바로 이 사람이 언제나 우리 어머니의 즐거움을 망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디틀레우'이기 때문이다. -85p
정상이 아니라는 게 끔찍하다는 건 나도 안다. 정상인 척하려고 애를 쓰느라 나도 나름의 고생을 하고 있다. 그래서 헤르만 방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되레 위로 받는 기분이 든다. -100p
이 세상 속의 나는 이방인 같다.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짓누르는 문제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144p
내게는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 이제 나는 어떤 진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고,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흉내 냄으로써 내게도 감정이 있는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내게 간접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에만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160p
중학교를 졸업한 토베는 <어린 시절>과 작별하고 <청춘>으로 들어서는데....
(삼부작 리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