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듯한 아픔이 잠시 찬식의 얼굴 위를 지나갔다. 민수는 그 노트를 받아 들었다. 노트 앞장에는 굵은 매직으로 '1983'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223p
그랬다. 그들은 고아들이었다. 생일을 모르기 때문에 죽은 날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겨우, 열몇 살이었던 그들은 죽음으로써, 아직 생명으로 충만한 붉은 피를 뿌리며 군부독재의 날카로운 총칼과 싸우다 죽어감으로써 태어난 날을 얻은 것이었다. 죽음으로써 삶을 얻은 것이었다. 민수는 그들의 묘비를 품에 안기라도 하듯 쓸어본다. 자신들에게 고아라는 슬픈 이름과 배고픔과 절망을 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은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것이었다. 진짜 예수가 어디 있는지 알아버렸다던 호신의 말을 민수는 그제야 이해한다. -255p
초판 1989년, 제2판 1998년, 제3판 2011년, 제4판 2018년. 불멸의 세계에 박제되었다고는 하나 20세기에 절판되고 잊혀진 책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 책만을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 30년 혹은 그로부터 다시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작품활동과 영향력에 기인하고 있다. 문학계 또는 사회에서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 그 시절,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 한다는 것. 그 이전에 가십소비자가 아닌 독자라면, 어째서 그녀가 글을 써야만 했는지를 직접 느껴봤으면 좋겠다.
비록 어렸지만 동시대인으로 <착한 여자>가 신문에 연재되었던 것을 목격한 기억, 수능이 끝난 2001년 집에 있던 <고등어>를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에 관한 키워드를 가볍게 스크롤했다. 흐릿하게나마 내용이 기억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읽었다. (영화는 못 봤다.) 구판의 표지만 서점에서 구경한 책들도 있고, 대여점에서(!) 빌려 읽었을지도 모르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그때도 지금도 비중이 있는 작품이다. (분명 어디서 많이 봤는데, 폐업한 대여점 같은 가족서재였는지, 수시로 들락거린 동남문고나 한강문고였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공지영'이라는 키워드에 알람이 울리진 않는다. 베테랑 (여성) 작가들의 책을 사냥하던 중 어디선가 본 듯한 제목을 뽑아들고 '1983'이라는 키워드에 반응했다. (사안에 따라-예를 들면 5.18-저자가 여성인 것이 내게는 필사적인 이슈일때도 있지만 그녀들을 젠더에 가둘 이유는 없다. 여성은 괄호표기하고 앞으로는 꼭 필요할 때만 쓰겠다.)
야만의 2010년대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낭만과 기만이 설치던 2000년대와 90년대가 있고, 정신줄을 잔뜩 조이고도 고통스럽게 회상해야하는 80년대가 있다. 물론 1983년 여름에 나는 뒤집기도 못하는 젖먹이였다. 오월 광주와 그밖의 모든 것은 간접경험이었다. 그러나 무구하고 투명한, 갓 태어난 아이의 시점(그런 게 있다면!)으로 불러오기에는 많이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잊혀진 역사는 자비없이 되돌아온다.
조금 더 많이 안다고 남의 것 등쳐먹는 놈들, 그런 놈들 비슷하게도 되어서는 안 돼. -117p
압제자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은 막상 그것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을 때 공포 어린 분노로 변했고 이윽고는 공포만이 남았다. 끝없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는 이 가난. -151p
너를 이렇게 빈정거리게 하는, 너를 이렇게 술 퍼마시게 하는 고통과 마주 서......그렇지 않다면 넌 비겁자야. -208p
어쩌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잘못된 부유함인지도 몰라요. -247p
그러나 그 알 수 없었던 죽음만큼 이 시대를 명확히 말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250p
아니야. 한계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얼버무려서는 안 돼. 한계는 주저앉으라고 인식하는 게 아니고 밀고 나가 깨뜨리라고 배우는 거잖아. -352p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라는 걸 믿지 않았다. 언제나 누가 시켰는가를 물고 늘어졌다. 누가 의식화를 시켰는가. 누가 평소에 데모를 하고 북괴를 찬양하며 은근히 너희들을 부추겼는가. 그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이 세상에서 자발적 의지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토론을 하고 그 결과가 나왔을 땐 자신의 의지도 그것에 귀속된다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았다.
-372p
다시 태어나는 일에 이만한 고통쯤이 없을까.
슬픔 속으로 미소가 떠오른다. -389p
공지영 작가는 첫 장편소설인 이 책을 5년에 걸쳐 집필하고 27세에 발표했다. 고심한 흔적과 팔닥거리는 날것의 기운이 공존한다. 이 젊은 화자를 어찌 옛날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