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황진이>
신분으로 인해 생긴 한을 어찌 신분의 상승으로 이기려 하겠습니까? 그것은 곧 모순된 신분제도의 타당성과 권위를 긍정하며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부조리에 가세해 부질없는 탑을 쌓는 짓이니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2권 196p
소설에서 진은 한번 보자는 정난정의 청을 전하는 남친(?)에게 그녀는 흉하고 위험하니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다. 장녹수와 같은 세대였던 진현금의 딸, 진은 신분과 여성의 운명으로 두 번 꼬인 삶을 스스로의 뜻대로 살아가려 했던 여성이다.
전경린의 2004년 작품을 드라마 <황진이>를 본 뒤에야 발견해 2007년 초에 읽었다. 드라마가 아닌, 이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읽는 동안 새로움과 재회의 느낌을 고루 가지게 됐는데, 근래에 업데이트한 레퍼런스와 시너지를 일으킨데다 (흐릿해진 역사적 사실이 TMI처럼 다가오기도 했지만) 저자의 문장에서 읽히는 운율은 내 어조의 뿌리에 있던 같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밀애>를 보고 추적한 원작자 전경린, 동시대 국내소설을 가장 왕성하게 읽었던 첫번째 시즌의 최애작가.
드라마에 앞선 송혜교 주연의 영화 <황진이>의 원작은 북한작가 홍석중(홍명희의 손자)이 썼고, 하지원 주연의 드라마 <황진이>의 원작은 김탁환이 썼다. 이들의 작품도 차근차근 읽어볼 예정이지만 같은 이야기를 더 읽는다면 전경린의 <황진이>를 다시 읽는 것이 우선이겠다. 그만큼 좋있다.
문장이 뇌리에 남아있다 해도 눈으로 읽었을 뿐, 저자가 한참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혼신을 다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저자는 자신의 영향력과 재능을 오롯이 담아서 전무후무한 예술가이자 사상가였던 황진의 삶을 문학속에서 복원했다. 역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순리를 거스르는 여성을 외면하기에 문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다른 생의 가능성은 정말 없을까. 이렇게 잘게 쪼개진 삼엄한 규율의 세계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전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1권 52p
나라를 뒤엎은 무리니, 전의 것을 부정하지 않고는 어디에서 세력을 얻겠습니까? -1권 79p
무섭다고 괴롭다고 엄살을 떨면 누가 받아줄 이가 있는가? 아프다고 슬프다고 과장하면 누가 속아줄 이가 있겠는가? -1권 128p
아니다. 그도 아닌지 모른다. 어느 날 다른 자리에서 보면, 또 다를지도 모른다. -1권 152p
그렇겠지요. 나라에선 암수 짝을 지어 백성을 부지런히 만들어야 병사도 뽑고 종도 부리고 기생도 만들고 세금도 걷고 수탈도 해서 수지가 맞을 테니 말이에요. -1권 174p
진은 어디를 가나 얼음장을 안은 듯 외로웠다. 그러나 이미 문제가 되는 외로움은 아니었다. 몸 안에 고인 얼음 호수는 어느 사이 익숙해진 생의 조건이 되었다. -1권 198p
저마다 일에는 목숨 걸어야 하는 구석이 다 있는 법이니, 너는 목숨을 걸고 마음을 한곳에 매이지 말아. -1권 250p
마음만으로...... 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것을 견딜 수밖에. -2권 36p
변함없이 남은 것은 삶을 뚫고 통과해가야 할 운명뿐이었다. 수많은 마음을 돌처럼 놓고 형식 없이, 형태 없이 넋처럼 지나가야 했다. -2권 146p
네 하는 짓, 네 생각과 말은 조선 백성이 아니라, 먼 외국의 여자 같구나. -2권 155p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정씨 부인도 진을 남편에 속한 여자로서가 아니라, 한 독립된 존재로 대하기 시작하였다. -2권 194p
제 몸 하나 단속 잘하고, 나를 통제하려고도 않고 내게 의지하려들지 않을 테니 저는 저고 나는 나라, 같은 길을 걷기도 하고 쉬 헤어질 수도 있으니 함께 유람 떠날 동반자로는 적임자지요. -2권 259p
스승님이 저를 바라보시던 흰 구슬같이 단단하고 맑은 눈빛이 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애 속에서 숨쉴 수 있도록 지켜주셨고 송도로 돌아오게 이끌어주셨어요. -2권 277p
2024년으로부터
20년 전에 출판된 조선시대 배경의 소설을 읽는 동안, 트럼프 시대에 역주행한 1985년 작 <시녀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과연 2020년대는 중종 시대와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다르지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