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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pr 02. 2024

몸 안에 고인 얼음 호수

전경린 <황진이>

신분으로 인해 생긴 한을 어찌 신분의 상승으로 이기려 하겠습니까? 그것은  모순된 신분제도의 타당성과 권위를 긍정하며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부조리에 가세해 부질없는 탑을 쌓는 짓이니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2 196p




소설에서 진은 한번 보자는 정난정의 청을 전하는 남친(?)에게 그녀는 흉하고 위험하니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다. 장녹수와 같은 세대였던 진현금의 딸, 진은 신분과 여성의 운명으로 두 번 꼬인 삶을 스스로의 뜻대로 살아가려 했던 여성이다.


전경린의 2004 작품을 드라마 <황진이>  뒤에야 발견해 2007 초에 읽었다. 드라마가 아닌, 이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읽는 동안 새로움과 재회의 느낌을 고루 가지게 됐는데, 근래에 업데이트한 레퍼런스와 시너지를 일으킨데다 (흐릿해진 역사적 사실이 TMI처럼 다가오기도 했지만) 저자의 문장에서 읽히는 운율은  어조의 뿌리에 있던 같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밀애> 보고 추적한 원작자 전경린, 동시대 국내소설을 가장 왕성하게 읽었던 첫번째 시즌의 최애작가.


드라마에 앞선 송혜교 주연의 영화 <황진이> 원작은 북한작가 홍석중(홍명희의 손자) 썼고, 하지원 주연의 드라마 <황진이> 원작은 김탁환이 썼다. 이들의 작품도 차근차근 읽어볼 예정이지만 같은 이야기를  읽는다면 전경린의 <황진이> 다시 읽는 것이 우선이겠다. 그만큼 좋있다.




문장이 뇌리에 남아있다 해도 눈으로 읽었을 , 저자가 한참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혼신을 다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당연히 모를  밖에. 저자는 자신의 영향력과 재능을 오롯이 담아서 전무후무한 예술가이자 사상가였던 황진의 삶을 문학속에서 복원했다. 역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순리를 거스르는 여성을 외면하기에 문학이  역할을 해야 한다.




다른 생의 가능성은 정말 없을까. 이렇게 잘게 쪼개진 삼엄한 규율의 세계 속에서  사람  사람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전체가 아니라  사람의 삶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1 52p


나라를 뒤엎은 무리니, 전의 것을 부정하지 않고는 어디에서 세력을 얻겠습니까? -1권 79p


무섭다고 괴롭다고 엄살을 떨면 누가 받아줄 이가 있는가? 아프다고 슬프다고 과장하면 누가 속아줄 이가 있겠는가? -1 128p


아니다. 그도 아닌지 모른다. 어느 날 다른 자리에서 보면, 또 다를지도 모른다. -1권 152p




그렇겠지요. 나라에선 암수 짝을 지어 백성을 부지런히 만들어야 병사도 뽑고 종도 부리고 기생도 만들고 세금도 걷고 수탈도 해서 수지가 맞을 테니 말이에요. -1권 174p


진은 어디를 가나 얼음장을 안은 듯 외로웠다. 그러나 이미 문제가 되는 외로움은 아니었다. 몸 안에 고인 얼음 호수는 어느 사이 익숙해진 생의 조건이 되었다. -1권 198p


저마다 일에는 목숨 걸어야 하는 구석이 다 있는 법이니, 너는 목숨을 걸고 마음을 한곳에 매이지 말아. -1권 250p


마음만으로...... 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것을 견딜 수밖에. -2권 36p


변함없이 남은 것은 삶을 뚫고 통과해가야 할 운명뿐이었다. 수많은 마음을 돌처럼 놓고 형식 없이, 형태 없이 넋처럼 지나가야 했다. -2권 146p




네 하는 짓, 네 생각과 말은 조선 백성이 아니라, 먼 외국의 여자 같구나. -2권 155p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정씨 부인도 진을 남편에 속한 여자로서가 아니라, 한 독립된 존재로 대하기 시작하였다. -2권 194p


  하나 단속 잘하고, 나를 통제하려고도 않고 내게 의지하려들지 않을 테니 저는 저고 나는 나라, 같은 길을 걷기도 하고  헤어질 수도 있으니 함께 유람 떠날 동반자로는 적임자지요. -2 259p


스승님이 저를 바라보시던 흰 구슬같이 단단하고 맑은 눈빛이 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애 속에서 숨쉴 수 있도록 지켜주셨고 송도로 돌아오게 이끌어주셨어요. -2권 277p




2024년으로부터 


20 전에 출판된 조선시대 배경의 소설을 읽는 동안, 트럼프 시대에 역주행한 1985  <시녀이야기>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과연 2020년대는 중종 시대와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다르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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