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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y 02. 2024

처치곤란한 여백

단편소설 <겨울의 책방산책>

지우는 정신없이 책 속에 빠져있었다. 책방에 오는 동안 한기를 잔뜩 품었고 메인 홀에서 몇 칸만 물러나도 포근함과는 무관해지는 동굴 같은 통로에 있기 때문에 빠르게 몸을 녹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굳이 추운 나라 겨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추운 날 패딩 산책을 하다 열이 올라 냉면을 먹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저 몸이 그 책 앞에 서서, 그 책을 0.3초 동안 응시하다가, 눈보다 빠른 손이 이미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책을 읽고 있었다.


석류는 기다렸다. 인어공주처럼 우아한 동시에 명랑한 지우의 실루엣이 점차 책에게 영혼을 뺏겨 (설마 목소리도?) 스타벅스 로고처럼 침묵에 빠져버렸다. 실어증에 걸린 세이렌을 깨워야 하나? 영지에게 받은 스타벅스 기프티콘이 생각났다.




책에 파묻힌 지우는 눈이 오는 북유럽을 한참 걷고 있었다. 재채기가 올라와서 고개를 돌렸다. 밖에 있을 때보다 더 추워진 것 같다. 뼛속에 스미던 한기는 없지만 자리에 앉으면 오들오들 떨게 될 것이다. 서가 사이에 서 있는 지금은 체중으로 미세한 전율을 누르고 있다. 재채기를 한 뒤 현재로 완전히 돌아왔다. 현실의 석류와 만났다. 석류는 이따 고기먹고 스타벅스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려다 말고 재채기 소리에 놀라 약간 물러났다가 다시 걸어오는 척 했다. 물론 지우는 그가 말을 걸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아예 못느끼고 있었다. 벌써 3시가 넘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식당까지 이동시간을 포함해도 30분 이상의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 시간은 둘 중 한 명 이상이 늦거나 다른 긴급상황에 대비한 것이지만 아무런 방해 없이 3시에 만나고보니 처치곤란한 여백이 됐다. 각자 책을 본다거나, 자연스럽게 (하지만 조용히) 근황토크를 하기엔 둘이 쌓아온 관계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지우는 술의 힘을 빌어 석류의 뒤통수를 지긋이 바라본 적도 있고 언제 퇴근하냐고 집요하게 물어보다 그 대화를 잊어버리고 혼자 귀가해버린 적도 있지만 그런 작고 귀찮은 실수들은 잊어버린 척하고 매번 새 간을 가지고 나타났다. 석류는 당연히 모든 대화를 실시간으로 기억하지만 반드시 저장해야하는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잠드는 동시에 포맷했다. 반드시 저장해야하는 에피소드는 지우가 거의 유일한 자신의 단골 고객이라는 한가지 사실로 요약된다.


이 관계의 가장 불공정한 포인트는 항상 지우만 음주(가무)를 하고 석류는 그녀가 원하는 만큼 취하는 데 협조해야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서비스로 술을 한잔 더 주는 건 괜찮지만 달라는 술을 안 주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석류가 일하는 곳에서 지우가 만취한 적은 없었다. 석류의 존재 덕분에 주량(은 곧 정신력)이 확장되는 것은 물론이고 외부상황이나 몸 상태에 따라 변수가 생기더라도, 지우는 도망가면 그만이다. 석류가 끝날 때까지 붙어있을 것처럼 말해놓고도 도망가면 그만이다.


그때까지 계속 취해있을 자신도 없고, 계속 취해있어도 아름답지 못할 것 같았다. 적당히 주량을 남겨둔 채로 밤을 꼬박 새도 석류는 완전히 맨정신일 것이다. 그게 꼭 이상한 건 아닌데, 막상 기다리다보면 계획도 몽상도 막다른 길이다. 취한 척 하고 도망가서 다음주에 다시 시작해야지. 그러다 그 무모한 애정을 결국 화폭에 풀었다. 석류와 지우의 시간대가 많이 다르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시간은 고정되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지우의 시간도 항상 부족하고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인데, 타인의 시간이 대체로 더 단단하게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때로는 매우 섬세하게) 맞춰주는 배려는 행복하기도, 귀찮기도, 서럽기도 했다.


언젠가 석류가 퇴근하기 직전에 맨정신으로 찾아와 저녁을 함께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려면 그 시간까지 또 어떻게 기다려.




석류는 새벽까지 놀고 있는 친구들 모임에 합류할 때가 많았고 집에 와서 혼자 놀다 잠들 수 있는 날이 오히려 더 좋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지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에게 주목하는 사람이 없어서 정작 범인(凡人)은 잘 모르는 범인의 자유를 누리고 살았다. 화려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석류도 화려한 인물이었고 운좋게 얻은 범인의 자유는 화려한 지우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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