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영 <낯선 위로, 아이슬란드>
오로라는 기다림이다. 밤 9시, 10시, 11시, 12시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일. 일상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왔는데, 이보다 더 단조로운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견디는 일.
-183p, 그로타 등대에서 만난 오로라
<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라는 살짝 귀엽게 발칙한 제목과 이제 겨우 이름이나 들어본 나라 조지아에 급관심이 생겨서 영어 책스타를 한/영 책스타로 확장했던 그 책 <조지아>의 저자, 에린 권호영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 마침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사인회까지 한다니 금상첨화! 이미 5일 중 둘째 날과 마지막 날을 얼리버드로 예약했지만 에린 작가의 행사가 있는 금, 토 중에서 토요일을 추가했다. (결국 일요일은 취소했다.)
여행에세이(혹은 그냥 에세이)라는 장르를 재구성한 것은 물론, 세상의 끝까지 호기심을 확장한 것에 더해 계획으로만 머뭇거릴 뻔한 블로그(혹은 여타 플랫폼)도 작지 않게 키워둘 수 있었던 건 모두 작가 에린과 사람 에린을 만난 덕분이다. 에린 작가는 내 능력이라고 말하는 편이지만 그 역시 인연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다. 앞서 출간한 네 권의 책에도 곳곳에 그 마음이 녹아있고, 신간 <낯선 위로, 아이슬란드>에는 극지방을 견디면서 발견한 성찰과 삶의 새로운 단계가 펼쳐진다.
아이슬란드 여행 정보(를 구하는 방법)도 상세하게 들어있다. 그러나 이 책의 묘미는 여행지가 여행하는 사람에게 새겨지는 방식에 있다. 실행에 옮길 사람들을 위한 여행 정보는 이 책과 함께 출간된 <아이슬란드 트래블 스팟 45>에 있으니 참고할 것.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샤워를 하면서? 에린 작가의 여행지는 대륙들이 만나는 곳이었다.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조지아,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혹은 그냥 세상-구세계-의 끝) 포르투갈, 유럽과 북미가 만나는 아이슬란드. 책스타와 블로그로 인연이 두터워졌으나 북유럽 스릴러, 에드워드 호퍼와 같은 강렬한 키워드가 없었다면 조금 달랐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가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그리고 (아마도) 에린 작가도. 여행지는 아쉬움을 남기고, 그 아쉬움을 모아 책으로 엮어도 더 큰 아쉬움이 남을 테지만 할 수 있는 건 다음 여행과 다음 책을 준비하는 것 뿐이다.
누군가의 시선도 겁내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마냥 기뻐하던 때가 언제였을까. 이해를 받기 위해 애쓰는 일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걸, 이렇게 문득 나무를 찾다가, 꽃에 감탄하다가 깨닫곤 했다. -51p, 꽃으로 뒤덮인 아이슬란드의 여름
가는 길 내내 창밖의 풍경에, 그러니까 보라색 여름 꽃밭과 털 뭉치 양 떼와 하얀 구름과 구름에 정신을 못 차렸을 뿐. 멀리 빛나는 바다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람에서 나는 내음은 여행이었다. 여행중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까. -92p, 웨스트피요르드의 작은 오두막 숙소
혹시 나에게 허용된 시간이 부족해서 짧은 기간 내에 링로드를 도느라 하루종일 운전만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해도, 아이슬란드 일부를 느낄 수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보이는 풍경 자체가 아이슬란드일 테니. 세상 모든 아름다움이 빠른 속도로 내게로 다가와 안길 것이다! (동시에 두 번째 아이슬란드를 계획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143p, 골든 서클
무작위 집단에게 인정받을 수도 있겠지만,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는 내 자유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였다.
-192p, 언제까지 나를 증명해야 할까?
아름다운 걸 보다가, 그에 대해 나중에 생각하다가, 나중에 나중에 눈물이 날 만큼 벅찬 감동을 다시 느끼기도 하는 걸 보면, 여행하다 만나는 장면 장면을 통해 나를 만나는 것 같다.
-210p, 죽기 전에 얼음동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한계를 그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을 향유하는 데 굳이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후회. -228p, 필름카메라
우리 모두의 오래오래 계속될 삶이라는 여행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