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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Nov 21. 2022

몸은 기억한다

미드 <앨리어스>와 영화 <본 아이덴티티>

맷 데이먼 주연의 <본 아이덴티티(2002)>는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제이슨 본의 기억상실증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이후 <본 슈프리머시(2004)>와 <본 얼티메이텀(2007)>으로 이어지는 3부작이었고 원작과는 제목만 같다.


제이슨 본이 쫓고 쫓기던 스파이 스릴러가 겹쳐 보이는 드라마, <앨리어스>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개의 시즌으로 방영되었다. <완벽한 그녀에게 단 한 가지 없는 것> 이전에 이미 제니퍼 가너가 원탑 주연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섯 번째 시즌에서 임신을 했지만 여전사 시드니 브리스토의 이름으로 세상을 구했고 드라마는 끝났다. 제이슨 본의 여성 버전 원탑인 <앨리어스>도 <본> 시리즈 소설과 영화처럼 시대를 앞서간 드라마였다.



제이슨 본과 마리 크로이츠(2002)


나는 누구인가?


제이슨 (Jason Bourne) 총을 맞고 대서양에 표류하다 어선에 의해 구조된다. 뱃사람들의 치료와 보살핌으로 회복하고 유럽에 당도하지만 자신에 대한 정보는 스위스 은행의 비밀 계좌번호가 새겨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떤 일로 칩을 이식하고 총을 맞았는지, 심지어 본인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이다. 금고 안에 있던 여러 개의 가명*으로 만들어진 여러 국적의 여권과 수상한 현금뭉치를 들고 추격을 당하기 시작한다.


제이슨은 몸이 기억하는 관찰력으로 마리 크로이츠에게 접근해 거액을 주고 운전사로 고용한다. 자신을 속박하려는 낌새를 느끼면 누구든 순식간에 제압하고, 추격하는 경찰과 저격수를 민첩한 액션으로 피하거나 무찌른다. 기억을 잃어서 영혼이 순수해진 그는 마리가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지명수배자가 되자 변장을 위해 직접 그녀의 머리를 염색해준다. 몸이 기억하는 애정표현도 명장면이다.  




시드니 브리스토(Sydney Bristow)는 <앨리어스> 시즌3에서 기억을 상실한 채 홍콩에서 깨어난다. 이미 2년에 걸쳐 그녀가 '속아왔던' 아이덴티티를 밝혀내고 CIA에서 이중간첩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기억상실증은 결과가 예상되는 서스펜스이다.



* 이와같은 가명들을 alias라고 한다.

시드니 & 잭 브리스토


거의 같은 주제가 반복되는 첩보전보다, 그녀의 담당자(handler) 마이클 (Michael Vaughn) 그동안 꾸준히 썸을 타고 있었던 것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스릴의 포인트였다. 기억상실증 자체보다,  결과로 갑자기 삼각관계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성 주연 원탑인데다 대장 빌런도 여성이라는 점은 고무적이나 조력자, 빌런을 포함한 주변 남성들의 영향력이 <> 시리즈와 같은 남성서사보다 촘촘하다.




로맨스릴러와 복수극


<앨리어스> 시즌1은 시드니가 당시의 남자친구 대니 핵트에게 청혼을 받고, 자신이 CIA 비밀 부서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직장은 알고 보니 반정부기관이었다. 이들은 모든 전화를 도청하며 기밀 유출에 경보를 울리고 추적하는 사람들이다.


대니는 시드니가 스파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술을 마시고 임무 중인 그녀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기는데 기밀로 분류된 단어가 감청되어 암살당한다. 시드니도 이를 누설한 죄목으로 쫓기지만 같은 조직 소속인 아버지 잭 브리스토(빅터 가버, 영화 <타이타닉>의 선장으로 등장함)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살아남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충성을 맹세한다.




<본 슈프리머시>에서 마리와 은둔하다 발각된 제이슨은 이 시리즈의 시그니쳐인 '자동차 추격전'을 벌인다. 차가 다리 위에서 떨어지는 순간 저격수의 총을 맞고 마리가 사망한다. 추격의 명분은 제이슨이 횡령한 증거가 있으며 CIA의 작전을 방해한다는 것이지만, 앞뒤가 안 맞는다.


제이슨이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눈치챈 대니 존(가브리엘 만, 드라마 <리벤지>의 천재 해커로 등장함)이 부패한 간부에게 살해된 후 <본> 시리즈의 긴장함은 더욱 탄력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맷 데이먼이 아니라, 가브리엘 만을 보기 위해 <본> 시리즈를 열었는데 본 게임은 대니의 사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제이슨 본 사건'을 처음부터 정주행한 핵심인력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니키(줄리아 스타일스)뿐이다.



제이슨 본 비상대책회의(좌), 대니 존(우)


<본 얼티메이텀>에서 제이슨은 이 사건들을 취재하고 있는 사이먼 로스의 기사를 읽고, 그에게 전화를 건다. 내부자를 통해 기밀을 알게 된 사이먼이 '경보가 울리는' 키워드를 발설하여 저격수와 요원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제이슨과 함께 추격을 당한다. 사이먼은 결국 저격수의 총을 맞고 즉사한다. 제이슨에게 별 반감이 없었던 파멜라와 니키는 이 사건 이후로 양심 없는 간부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막장은 망작이 아니다


국가정보원이 은밀한 생체실험과 살인을 저지르고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문제는 <본 레거시(2012)>와 <제이슨 본(2016)>에서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다. 국가기관 또는 엘리트 그룹의 내부 유닛이 저지르는 비공식적인 음모는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앨리어스>의 FBI 버전인 <화이트칼라>, <블랙리스트>는 물론, 가브리엘 만이 출연하는 <리벤지>와 <왓/이프>에서도 반국가적 음모세력은 20세기 소비에트 연방 또는 그에 준하는 단체의 스파이 포지션을 계승한다.



제이슨 본의 유명한 옥상점프 장면(2007)


국정원 음모론의 (적어도 21세기의) 시조새 <앨리어스>는 어쩐 일인지 저세상의 막장 아우라가 느껴진다. 디스토피아인 듯 디스토피아 아닌 이 스파이 스릴러의 작가는 바로 <로스트>를 쓴 J.J. 에이브람스다. 한국계 배우가 한국인 역할로 멀티캐스팅이 되었고, 특히 국내 인지도가 충분한 김윤진 배우가 출연한 <로스트>도 시대를 앞서간 드라마였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보다 <앨리어스>가 1년 먼저 등장했지만, <본 아이덴티티> 원작 소설은 1980년에 출간되었다. 로버트 러들럼(1927-2001)은 44세에 소설가로 데뷔해 약 20년 동안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현대 스릴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앨리어스>의 야릇한 세계관을 창조한 에이브람스가 <본 아이덴티티> 개봉 전에 이미 러들럼을 참고해서 '마이클 본'이라는 조력자를 창조했을지도 모른다.


제이슨 본(Bourne)과 마이클 본(Vaughn)의 라스트 네임은 스펠링이 다르지만 어감이 비슷한 데다, 한국어로 표기하면 같은 '본'이 되어버린다. 특히 시드니가 마이클을 칭할 때는 항상 '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사의 중심은 '브리스토' 부녀에게 있다.




시드니는 기자인 친구, 윌 티핀(브래들리 쿠퍼, <아메리칸 허슬>과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제니퍼 로렌스와 열연함)의 동생을 잠깐 본 적이 있었다. 윌을 통해 그녀의 여권을 빌리고 그녀처럼 빨간색으로 염색한다. 미국에서 '빨간 머리'로 통하는 당근색 머리가 아니라 잘 익은 토마토색이다. 제이슨 본이 직접 염색해준 여자친구, 마리 크로이츠 역을 맡은 프랭카 포텐테가 1998년에 이와 같은 토마토색 빨간 머리를 하고 원탑 주연으로 런닝맨처럼 뛰는 영화가 있었다. 에이브람스는 이 영화도 봤을 것이다.


<앨리어스>의 방영과 영화화된 <본 아이덴티티>의 개봉과 원작자인 로버트 러들럼의 사망 시기가 비슷비슷해서 전후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무리다. 프랭카 포텐테의 캐스팅 소식에 영감을 얻어서 <앨리어스> 파일럿의 시그니처에 응용한 것인지 단순한 우연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두 작품의 세계관을 파고들수록 평행우주가 연상될 뿐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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