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스톤> 28화
(전편에서 계속됨)
애정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해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 광산에 정착한 복영은 남몰래 무병을 앓았고 여러 번의 유산을 겪은 후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낳은 앤에게 애정(愛情)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과묵한 복영의 남편 석은 아내의 건강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복영은 노산으로 곧 세상을 떠났다. 앤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석은 누군가가 필요했다. 복영이 의지하던 한인 언니 민하는 몇해 전 남편을 잃었는데, 복영마저 잃고 나서 앤의 보모를 자처했다. 의지할 곳 없기는 마찬가지인 석은 딸을 애지중지하는 민하를 가족이라 여겨 정성껏 가장 노릇을 하려고 했다. 모든 선택의 기준은 앤의 생존이었다.
앤이 사춘기에 도달했을 때 석과 민하는 이미 연로했다. 앤은 캘리포니아가 싫어서 석과 민하가 차례로 세상을 뜨자 소박한 유산을 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갔다. 때마침 뉴욕으로 가는 한인 무리가 있어서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달했으나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앤의 내면에는 모험에 대한 욕구가 있었으나 아버지의 묵묵함과 생모가 아닌 어머니의 알 수 없는 집착 속에서 키워온 불안도 있었다. 새로운 땅은 궁금했지만 새로운 사람은 두려웠다.
사람을 믿기 어려워 흔적을 남기지 않고 방랑하기 시작했고 영어가 늘어갈수록 한인들과 접촉하지 않는 날이 길어졌다. 크고 작은 사건을 지나 스콧을 만나고 마야를 낳을 때까지. 아니, 마야를 낳은 후에도 앤은 안정되지 않았다. 앤은 캘리포니아가 그립지 않았지만 뉴욕도 내 땅은 아니었다. 가보지 않은 진짜 고향에 가야할 것 같았다. 밤마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채 무릉도원을 헤매다 일어나면 현기증나는 도시에 시달렸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 그것도 뉴욕에서 이런 경험은 흔했다. 그러나 잘 적응하고 사는 것처럼 연기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 마음을 드러내긴 쉽지 않았다.
스콧은 속병을 앓는 앤을 놔주었다. 이것도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앤은 한국에 가야 하고, 가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가기엔 너무 어린 마야를 어떻게든 잘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앤은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만 안도하고 득녀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마야를 보면 죄책감에 시달렸다. 마야와 헤어지는 경험은 고통스러운 쾌감을 선사했다.
앤은 한국에 갔고 가서 꿈에 나온 커다란 집을 발견하기까지 2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석이 간직해온 복영의 사진을 알아보는 사람을 찾기까지가 훨씬 오래 걸렸다. 복영이 살아있었다면 70대, 그녀의 얼굴을 기억할리 없겠지만 똑같은 사진을 갖고 있던 복영의 사촌이 죽기 전 장녀 미정에게 복영의 이야기를 했고 애정에게는 육촌 언니인 미정이 복영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애정과 미정은 서로에게 유일한 혈육이었던 것이다.
애정은 혼자 사는 미정이 분식집을 하며 삼시세끼를 차려주는 식구나 마찬가지였던 단골 총각 정현과 매일 겸상을 하다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밥은 여전히 분식집에서 먹었다. 낮에는 애정이 미정을 돕고 미정은 밀린 자기계발을 하고 정현은 알뜰하게 모아둔 재산으로 자녀계획을 세웠다.
아직 아무도 몰랐지만 애정은 이미 미나를 품고 있었다. 미정은 산후우울증을 암시하는 애정의 상태를 들었기에 태몽을 대신 꾸었다는 말을 최대한 늦게 했다. 하지만 미나는 오히려 애정의 삶에 없는 줄 알았던 안정을 가져왔다. 진정한 고향에서 이모 같은 육촌 언니를 만났으나 언니와 정현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어도 이별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마야를 낳고 자신의 죽음 걱정은 덜었지만 자신을 낳은 후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았다. 미나가 태중에서 존재감을 알려오면서 애정은 더 이상 무릉도원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이미 무릉도원에 도착한거야.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한 작은 아이가 마치 아이 셋은 낳은 것 같은 성인 여성의 목소리로 밤마다 애정을 위로했다. 애정은 아침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그리워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