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 서재

<레베카 스톤> 27화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전편에서 계속됨)


마야에게도 미나와 마르셀이 이야기를 맞추었다는 내용의 간단한 문자가 도착했다. 미나는 베키가 활약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는 말로 그간의 상황을 정리했다. 마르셀과 메러디스의 혈육들은 미나와 같은 능력을 가지진 않았어도 미나의 공식적 영매 활동과 그 이상의 비밀을 아는 모양이었다. 마야는 무당이었던 할머니의 피가 흐르는 자신의 몸을 생각했다. 이걸 미나는 역마살이라고 했다. 취향 이상의 강한 이끌림. 미국인의 상당수는 자기 동네를 벗어나지 않지만 다른 상당수는 대륙의 반을 차지하는 국내여행을 거침없이 다닌다. 전세계를 탐하는 마야는 자신이 혼혈이어서 그럴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한국인들은 그 정도면 방랑욕에 ‘살이 꼈다’는 의미를 추가한다고 했다.


확실히 아이들은 마야보다는 덜 활발했다. 정적이고 섬세한 샘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아들들보다는 베키가 모험심이 있었다. 그런데 베키가 해외여행을 먼저 가자고 했던 적이 있었나? 마야는 자신이 원하는 걸 아이들도 원한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적어도 둘째는 확실하게 아빠를 닮은 미니 샘이었다.


“누나는 오늘도 저녁 먹고 오겠죠?”

”응. 잘 시간이 되면 조르주 삼촌이 데리고 올거야. 엄마가 스테이크 시켰어. 조금만 기다리자?“


베키의 시야가 외부로 향하는 동안 약간의 분리불안을 겪고 있는 벤은 자신의 욕구를 누나에게 투사하는 것 같다. 엄마에게 밥을 달라고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 아마 누나에게 배고프다는 얘기를 했다가 누나는 배고프지 않다는 장난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베키는 어려서부터 무언가에 몰두하면 밥도 잠도 잊는다. 동생들을 챙기느라 억지로 먹었던 적도 많을 것이다.



마르셀의 집은 활짝 열려있었다. 마르셀을 통해 볼로뉴 숲에 대한 힌트를 얻은 경찰들은 밤이 깊어지기 전에 숲으로 달려갔다. 혹시 모를 전화나 납치범의 기습을 대비해 두 명의 경찰이 마르셀의 거실에 남아 있었다. 조르주가 아이들을 데리고 도착했을 때 그들은 마르셀과 헨리크에게서 최대한의 정보를 끌어내는 중이었다. 헨리크는 줄리앙과 이제 막 알게된 사이인지라 격해진 감정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희도 오늘 하루종일 찾아다녔어요.”


베키를 본 헨리크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평정심을 되찾았다. 자신이 마르셀이나 줄리앙과 특별한 사이는 아닌데, 왜 마르셀 옆을 지키고 있는지 의문을 살까봐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경관님. 저희도 여태 찾다가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헨리크의 표정을 읽은 베키도 지친 몸을 이끌고 헨리크 옆에 앉으면서 그의 난처함을 마음으로 다독였다. 헨리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이제 모두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구나. 저 분은 아빠니?”

“저희 아빠예요. 베키랑 헨리크는 친구들이고요. 마르셀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에요.”


헨리크와 베키가 각자 자기 식구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폴이 빠르게 대답했다. 자기만 보호자가 있다는 게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조르주는 베키에게 배정된 보호자였고 폴은 그저 베키와 떨어질 수 없었을 뿐이다. 이걸 남들이 굳이 알아줄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폴 스스로가 납득하고 싶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이들은 쉬게 해주세요.“


조르주가 헨리크에게 배정된 경관과 인사하면서 폴을 베키 쪽으로 밀어주었다. 베키는 폴의 손을 잡았다가 헨리크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가면서 다시 폴에게 눈짓했다. 아이들은 2층에 있는 줄리앙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여기는 사건 현장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베키가 막 방에 들어서려는데 문득 소설 속 장면이 생각났던 헨리크가 뒤에서 머뭇거렸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지?“

”선생님이 아까 옆방에서 쉬어도 된다고 했어.“


줄리앙의 방과 붙어있는 방은 보조서재였다. 큰 소파와 독서 의자, 낮은 책꽃이들 위로 분류하지 않은 듯한 다양한 책이 쌓여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헨리크는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버렸다.


”나 헨리크랑 잠깐 얘기 좀 할게.“

”그럼 주방에서 먹을 것 좀 가져올게.“

폴이 나가는 걸 본 베키는 단숨에 헨리크 옆에 앉아서 질문을 쏟아냈다.


”별일 없었어? 선생님이 오빠의 마음을 알게 됐어? 메러디스 할머니도 알아? 제이미 언니는 어떻게 됐어?“

”그걸 내가 다 어떻게 알아.“

”할머니랑 언니는 집에 갔다며.“

”할머니는 할일이 있고, 누나도 자기 동생들이 있잖아.“

”선생님은 뭐래? 선생님이 먼저 밝혔어?“

“내가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하시더라.”

“역시. 알고 계실 줄 알았어. 이제 제이미도 알게 된거지?”

“그런 것 같아. 자세히 묻지는 않았어.”


폴이 빵과 과일, 우유컵이 놓인 쟁반을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아서 우유를 마시는 동안 베키는 조용히 일어나 책장을 구경하는 척 했다. 베키는 폴과 둘이 있을만한 핑계를 찾는데 골몰하느라 헨리크가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도 좀 쉬자.”

“어? 헨리크는 언제 나갔어?”


내내 추웠던 하루가 열기로 가득차는 것 같았다. 헨리크는 폴이 가져온 우유 한 잔과 빵을 들고 나간 모양이다. 다시 거실로 나갔으려나. 혼자서라면 크게 방해되지 않을테니 슬쩍 줄리앙의 방에 가서 줄리앙을 생각하고 있을수도 있다.


“옆방에 있을거야. 써프라이즈였나?”


베키가 딴청을 부리는 걸 보고 헨리크가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궁금한 걸 다 알아냈으니 폴과 같이 있고 싶다는 티를 낸 걸까. 폴은 지금 자기 혼자 이 방에 있는 것이 헨리크가 의도한 써프라이즈라고 말하고 있는 것가? 베키는 맹랑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얼굴이 빨개진 베키를 보고 폴은 웃으면서 빵을 잘라서 접시에 담았다. 이번에는 폴이 딴청을 피울 차례였던 것이다.


베키는 폴의 옆에 앉아서 그가 자신을 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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