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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스톤> 25화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전편에서 계속됨)



이제 마르셀은 다시 한 번 헨리크와 단둘이 남겨졌다. 그들만 알던 삼각관계, 어쩌면 제이미와 메러디스, 어쩌면 베키도 알고 있겠지만 줄리앙의 상황이 시급한지라 다른 건 모두 너무나 부차적이다. 마르그리트는 순수한 사랑을 부정당한 상처가 컸고 제르맹까지 잃은 후 갈 곳이 없어진 마음을 전부 줄리앙에게 주었다. 그 폭풍 속에서 하나뿐인 혈육인 마르셀의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했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미나는 마르그리트의 진정성을 꿰뚫어보았다. 그런 건 그냥 알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마르그리트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나 그로 인한 종교와의 불화를 자발적으로 털어놓은 사람은 미나 뿐이듯 미나 역시 자신이 영매라는 걸 자발적으로 알려준 사람은 마르그리트 뿐이다. 조력자들은 미나가 설령 범죄자라고 해도 의리를 다할 사람들이고 캐묻지 않기에 장황한 설명 없이 서로를 의지한다. 영매라는 공통점을 알아본 이계의 사람들과 조력자를 제외한 단순 협력자나 서점 고객들의 경우 다만 짐작할 뿐이고 서로 오해를 감수하고 적정선에서 관계를 유지했다.




베키는 초희가 나타날 때까지 차분한 마음을 되찾는데 온힘을 다했다. 초희가 말했던 위치가 그 건물임은 확실했다. 폴과 조르주도 그 이상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간제한 또한 확실했던 미션이다. 그들은 타임아웃이 되어 돌아와야했다.


“돌아왔구나. 잘 했다.”

“줄리앙은 명이 다한 건가요?”


베키는 자신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해내는 것에 깜짝 놀랐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더 놀랄 것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올 뿐이었다.


“그래. 안타깝지만 너희가 도착하기 직전에 숨이 멎었어. 그래서 너희가 갔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게 더 낫겠구나. 남은 일은 경찰에게 맡기도록 하자.”

“마르셀과 헨리크를 먼저 보내길 잘한 걸까요?”

“그들은 어떻게든 그 문을 열려고 했을거야.”

“그렇겠네요. 저에게만 초희 어르신이 보이니까 시간제한에 대해 설득하기 어려웠겠죠. 다시 오라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나가서 신고할 사람을 정하렴.”


말을 맺기 전 초희의 모습은 이미 투명해졌고, 목소리의 여운보다 형체가 먼저 사라졌다. 베키는 너무 서두르지는 않으려고 애쓰면서 폴과 조르주에게 돌아왔다.




미나는 깨어있는 상태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저녁을 한번 더 먹고 다시 잠들었다. 깊은 잠은 아니었으나 파리의 수색조들의 긴장감을 애써 느껴봐야 소용없기에 마음을 다스리는 휴식을 이어갔다. 새벽에 가까운 깊은 밤 꿈속으로 스르륵 돌아와 베키와 초희의 대화를 목격했다. 초희가 사라지면서 미나의 의식은 완전히 돌아왔다.


폴 또는 조르주에게 연락할지 마르셀에게 연락할지 결정해야했다. 빨리 결정하지 못할거면 베키에게 맡겨야했다.




조르주는 더이상 다급하지 않은 베키의 발걸음과 목소리에서 상황을 짐작했다. 이쪽에서 마르셀에게 연락하고 마르셀이 바로 신고해야한다. 하지만 조르주나 폴이 베키가 받은 신탁을 마르셀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시차를 초월해 미나와 먼저 상황을 공유해야 했다. 하긴, 미나가 이 상황을 모를 리가 없지.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미나와 조르주가 연락을 해도 될지 고민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조르주 삼촌이 말씀하시는 것보다 미나 이모가 연락하는 것이 나을까요?”

“그럼 이모한테 전화해볼래?”


베키는 심사숙고한 티도 안 내고 저런 말을 잘도 한다. 어쩌면 아직 몸주의 영향이 남아있어서 그런걸까. 덩달아 조르주까지 자신의 상황을 고려한 제안을 해버렸다. 폴이 태어난 후로 미나와 둘만의 대화를 하지 않았고 미나와 폴의 관계도 철저히 르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 르네가 다른 도시에 있는 것도 아닌데 폴이 보는 앞에서 미나와 통화하는 모습을 보이면 폴이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조르주의 영원한 사랑이 미나라는 것은 르네도 폴도 알고 있지만 폴에게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동안 모두가 폴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이 암묵적 합의사항이었다.


“이모가 마르셀 선생님과 통화했다고 해요.“


폴과 베키에게 ‘마르셀과 통화 예정’이라고 간단하게 문자를 한뒤 마르셀과 통화를 마친 미나는 다시 ‘통화 완료’라고 확인하는 문자를 보냈다. 베키가 문자를 확인하는 것도 잊고 통화내역에서 이모를 찾는 동안 폴이 먼저 미나의 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다행이구나. 다른 말은 없고?”

“이제 선생님 댁에 가서 상황을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세요.“


베키에게만 추가로 도착한 문자가 왔고, 폴에게 온 문자를 확인하던 베키는 최신순으로 읽게 되었다. 이어서 베키가 굳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 했다는 문장이 도착했다.


”그래, 그럼 어서 이동하자.“


폴과 베키는 서둘러 주차장을 향하는 조르주를 날렵하게 뒤쫒았다. 가는 동안 베키의 손을 잡은 폴은 이전과는 다른 설렘을 느꼈다. 지금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 어린 사람의 소멸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아무리 어릴지라도 생에 대한 본능적 욕구가 치솟는 시간이었다. 베키는 몸주에게서 완전히 해방되는 느낌을 알게 됨과 동시에 폴에게 손이 잡혀 감전되듯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폴과 처음 손을 잡은 그날도 강렬했지만 이제는 익숙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베키는 자신과 폴이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충동이든 운명이든 그런 건 굳이 몰라도 되었다. 어른의 혼에게 몸을 빌려주면 어른의 몸을 기억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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