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가 열어준 세계에서 나만의 영역을 개척하기
영역이 없다는 건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약점은 그걸 인정하고 나아가 자랑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약점이 아니게 되지만(이것 봐, 난 이런 약점도 있어!) 그럼에도 전 세계의 능력주의자 중에서 가장 피해의식이 많은 한국인이 대다수인 한국 사회에서 내 영역이 없는 건 약점이었다. 기술이나 기능 분야의 마스터도 아니고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승진투사도 아닌 데다 특별히 어떤 분야의 활동가라고 할 수도 없고 공부도 하다 말아서 시간이 갈수록 뭘 아는 척하는 것이 창피한 시절이 왔다.
뭐 어때, 배우면 되지. 그렇게 시작한 삼십 대였고 의도치 않게 여러 분야를 거쳐 '거의 마스터할 뻔한' 기술과 기능이 늘어났고 계약서 따위는 구경도 못해본 일용직 노동과 파트타임을 전전하면서도 이상하게 심리적인 승진은 많이 했다. 정신 차려보니 이제는 어디를 가도 정신적 지주다.
이상한 강제 재택근무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노마드로 여행하면서 일할 수 있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꿈꾸었다. 여행을 하면서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가끔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몇 년 이상 거주하면서 공부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내게 맞을지 알아보려고 시도했던 2016년 한 달 살기는 세렌디피티와 '될 대로 돼라'가 뒤섞인 시행착오 그 자체. 이 시행착오와 때 이른 대상포진에 대한 분노의 여행계획으로 이루어진 2019년 한 달 살기는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그때만 해도 영어책 한 권을 읽다 말다 했었는데 귀국할 무렵 개강했던 원어민 수업 덕분에 귀가 안 막힌 상태로 비교적 익숙한 과학논문(!)을 읽다 보니 반년만에 눈트임까지 했다.
여행은 이제 남들도 못 가니까 (2020년 기준) 마지막으로 멀리 갔다 온 사람이 정신적 위너였다. 그런데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약점(?)이었던 영어까지 강점이 됐다. 그 이야기만 비슷비슷하게 반복해도 스스도 뿌듯했고 해외 교류가 차단된 한반도에서는 위너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영역이 없었다. 영어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기에 영어로 해야 할 일들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책을 읽다 보니 책 욕심이 많아져서 국내서가 점점 늘어났다. 원서는 며칠만 안 읽어도 루틴이 깨져서 나도 모르게 방학모드가 되어버리는데 국내서가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모국어로도 책을 빨리 읽는 편은 아니다. 원래 좋아하는 스릴러 소설 위주로 읽기엔 지금 읽고 싶은 우선순위의 책이 너무 많지만 공부모드로 읽는 것도 아니다. 그간 재미를 못 느꼈던 논픽션이나 에세이 분야에서 내 취향의 작가들을 발견하고 있다. 신간은 해외 보급판과 번역서 중에서 먼저 나오거나 더 저렴하거나 더 예쁜 책에 끌리지만 번역서를 읽고 원서까지 사둔 책도 있다. 다른 책도 많아서 이런 중복템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책을 훨씬 더 많이 읽고 있거나 특정 분야에 강한 분들을 알고 있기에 애서가로 어디에 명함을 내밀만한 정도는 아니고 그냥 바이링구얼 리더로 영역 표시나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귀국 3년 차가 되도록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여행사진을 정리하보니 어느새 여행에세이를 쓰고 있었다.
여행사진의 캡션은 기분에 따라 짧게는 한 문장, 길게는 1000자 정도 쓰던 냅킨에세이였는데 어느 날부터 2000자가 모자라서 연재물이 되어 있었다. 그 초대형 냅킨을 두루마리처럼 이어 보기로 했다. 미국 산책편은 방학을 맞았지만 그 후속으로 여행과 여행사이를 채워준 미국 드라마 관람기를 기획했다.
그러고 보니 영상리뷰 프로젝트는 거의 해마다 등장했던 새해 계획이었고 특히 2020년에 '반드시' 개시하리라고 마음먹었던 장르이다. 코로나를 예상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유튜브를 겨냥했지만 촬영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비록 3년이나 연기되었지만 그 사이에 영역이 어느 정도 생겨난 느낌이다. 기존 크리에이터들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갔다기보다는 그냥 내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여행사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미술관 내부샷은 여러 버전의 시행착오를 거쳐 작가별로 분류해서 정리하고 있다. 미술관 통합 리뷰, 미국화가 도장 깨기 느낌으로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되었다. 작품을 감상했던 기억은 희미하지만 증거로 남아있는 사진을 통해 해당 작품의 위상과 그 작가의 사연을 뒷조사하는 재미가 있다. 아주 유명하거나 아주 별로인 작가를 제외해도 2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에세이를 읽다 보니 터저나 오는 내 사연이 지금 쓰고 있는 자아성찰 에세이(이 글)이다. 그와 함께 인스타 가이드북까지 쓰려고 한다. 자아성찰 에세이와 인스타 가이드북은 퍼스널 브랜딩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을 시도하는 쌍둥이 프로젝트다. 전자는 나를 알리고자 하는 관종의 심리, 인간관계 속 자아에 대한 정신적인 접근이고, 후자는 그 심리를 충족시키는 매개체로의 '인스타그램' 활용 목적과 방법이다.
미국 여행에서 수집한 정보와 미국 배경의 콘텐츠를 조합한 직간접 경험에 대한 글쓰기가 중심이되 자연스럽게 등장한 퍼스널 브랜딩 이야기가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사이버 세계와 인간의 내면세계에서도 사고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어린 시절에 '꿈'이 무엇인지 답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어린이들은 직업이나 재산 위주로 꿈을 표현한다. 미국의 남녀노소에게는 재산을 유지하고 늘리는 일이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기본적인 사항이다. 특히 물욕과 과시욕이 많은 사람은 남들보다 '더' 부자가 되려고 하겠지만 보통은 '일과 가족, 나 자신' 사이의 그 무언가를 지향한다.
꿈은 일단 크게 꾸자. 관혼상제나 번식, 밥벌이를 꿈으로 삼지 말자. 내가 추구하는 것이 인기인지 작품성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추구하자. 나이가 드는 것을 기뻐하자.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경험치가 쌓이는 세월을 소중히 기억하자.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