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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35살이라는 나이

하나님의 응답? 나는 왜 그렇게 결정을 했을까?

by 민트러버

그는 가족의 개념을 몰랐다.

자기가 하는 것이 다 옳았고, 자신의 기준이 디폴트였다.

혼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은 조심하라는 말이 있는데, 결혼하고 그 말을 알아버렸다.


하나님의 컨펌, 사인 있었지만 사실 선택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렇게까지 선택하도록 모든 환경과 상황이 열린 것도 사실이었지만, 최종 선택은 내 몫이었다.


내가 결혼을 빨리 결정하게 된 것도, 선포한 날짜에 결혼하게 되면서 발생했던 짚고 넘겨야 할 것들을 넘겨버린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이 든다.

평소에 계획적이고, 옷 한 벌을 사도 80%~90%는 한 번에 사지 않고 2,3번 매장에 가거나 장바구니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고민하는 나는 왜 결혼 상대자의 불편한 것들을 넘겨버리는 선택을 했을까?




첫 째, 세는 나이로 35살이 되니까 마음가짐이 달라졌었다. 남자도 그렇겠지만 여자가 35살은 적은 나이가 아니다. 지금에야 결혼 적령기라고 하지만, 20대에 빨리 결혼한 내 친구는 벌써 첫 째가 초등학생이다. 어린이집, 유치원 다니는 자녀를 기르는 학부모의 나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웬만한 친한 친구들, 지인들이 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난 언제쯤일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함께 배우자기도를 했던 언니, 친구는 응답받아서 결혼하고, 왜 나는 응답이 안되지라는 낙심과 절망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기도는 점점 간소화되면서 많은 부분들을 내려놨다(?). 내려놓은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면서 분별도 같이 해야 하는데, 분별보다 '결혼'이라는 목표달성에 초점이 맞추다 보니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보다 '아주 하자되고 문제 되는 것 아니면 내가 맞추거나 넘기자'의 마인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정말 선포한 날짜에 결혼이 진행이 되었고, 한 주 한 주 업데이트가 되어갔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흔히 이상형으로 많이 이야기한다.

그렇게 대화가 잘 통했던 사람이 특히나 '영적인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왜 결혼하고 나니 말이 안 통하는 사람으로 전락했을까? 그런 사람이 나에게 가스라이팅하고 인생에서 만나면 안 되는 말을 섞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된 것일까?


그는 나에게 갈등이 있으면 막말을 했다.

"말귀를 못 알아먹어!"


살다가 처음 듣는 표현이다. 내가 말귀를 못 알아먹어? 아니 못 알아먹는다고 해도 사람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맞는 건가,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표현을 해. 나 너무 기분 나빠."

"그게 왜 기분 나빠?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 못 알아먹는다고 하지. 이게 왜 이상한 말인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필터링 없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툭툭 던지는 말들에 나는 너무 상처를 받았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연애 때도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다.

본인은 '사실적'이라고 던지는 말,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나에겐 상처가 된 적이 많았던 기억이 생각났다.

마무리는 사랑한다라는 말로 어떻게 무마시켰으니 이 사람의 본심이 아닌가 보다 넘겼던 것 같다.


또 짚고 넘어가지 못했던 것

돈 문제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이런 남자는 사실 처음 봤다. 사람마다 민감할 수 있지만 나에게 돈에 얽매이지 말라하면서 하나님이 채워주신다고 했던 사람인데 현실 속에서는 엄청나게 물질에 예민한 모습 속에 숨이 막혔던 것 같다.


최근 한 주 동안 깨달았던 것이 있다.

이 사람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00 이와 결혼하고 싶은 건데, 00 이는 나보다 결혼이라는 것이 하고 싶은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니 ‘결혼’을 이 나이에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좋아하는 사람보다 앞섰다. 헤어질 때 나는 붙잡고 상대는 안아주고 울면서 마무리되었던 생각이 들면서 헤어진 것의 배신감이 많이 컸지만 나의 어리숙하고 연약한 모습이 드러났구나 깨달아진다.


두 번째, 어제 금요예배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았던 내용이다.

우리는 '이것만 이루어지면, 이것이 해결된다면..'이라는 마음을 많이 가진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은 가족 안에서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형만 편애했던 아버지 이삭. 쌍둥이지만 차남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야곱은 결국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모의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는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를 속이고 에서가 죽일 것만 같아서 그 길로 집을 도망쳐 나와서 자신을 사랑해 주던 어머니와 평생 보지 못하게 되고, 본인도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겨주게 된다. 그리고 찾아가게 된 삼촌 라반의 집에서 딸 라헬을 보고 반해버렸다. 라헬에 대한 집착과 소유가 강해서 7년을 무보수로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 일을 하게 된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혼식을 치르고 다음날 아침에 보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다.


우리도 살다 보면 간절히 원하는 것만 이루어지면 행복해질 것 같은데..

그게 바로 '구원'의 관점이다.

이것이 나를 구원해 줄 것만 같은데, 내 마음을 채워줄 것만 같은데

하지만 다시 허무해지는 '레아'와 같은 아침을 맞이한다.


나도 내 안에 갈급함을 채울 것, 외로움을 채우고 싶은데 그게 내 힘과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 것이다.


두려움은 불안함과 조급함을 세트로 몰고 온다.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지만 정작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초조하고 불안하고 맡기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내 입술에서 이런 고백이 나왔다.

'하나님 제가 결혼이 우상은 아니었을까요. 결혼만 이루어지면 이제 행복해질 것 같은데, 결혼만 하면 나도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심심하지 않게 남편이랑 놀고, 함께 말씀 나누고, 하나님 이야기하는 행복을 누리지 않았을까.. 생각했었어요.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보다 결혼을 갈망했던 것 같아서 죄송해요.'


너무 아프고 억울한 기억이지만, 이 시간이 어찌 보면 필요했기에 하나님은 허락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어려움을 회피하고 다시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끄집어서 다시 쓰는 일들을 통해 나를 마주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나중에 누군가를 또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될 때, 나와 같은 터널을 겪는 누군가에게 이 글들이 힘이 되겠지.


#크리스천

#결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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