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첫눈이 내렸다. 갑자기 추워진 어느 때부터, '오늘 첫 눈이 올지도 모른대!'하며 기다려왔던 첫눈이. 점심을 먹고 졸린 눈을 하고 앉아있던 와중 바깥에서 동화처럼 소복소복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 온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다. 졸리고 피곤하고 나른한 월요일 오후의 사무실은 첫눈 소식으로 잠시나마 들떴다.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더운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게, 차디찬 겨울이 시작됐다. 난 얼마 전 첫 출근을 한 지 1주년 되는 날을 맞았다. 그때만 해도, 내가 일을 시작하고 1년 후면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 무지하게 궁금했는데, 그 당시의 궁금증이 무색하게 난 그대로다.
회사일은 지루하다. 새로울 것 없이 반복된다. 물론 늘 새로운 기록들을 보지만, 큰 틀에선 반복되는 일이다. 이변이 생겨도 나의 의견이 끼어들 틈은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법에 근거해서, 법이 시키는대로 해야할 뿐이다. 법과 매뉴얼. 답이 정해진 일들을 난 그냥 시키는대로 할 뿐이다. 생각없이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싶었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나보다. 내 생각이나 능력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에 종종 무력감을 느낀다. 이 조직에 있다가 보면 난 발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인간이 꼭 발전해야 하는건 아니지만, 이 조직에서 쭈욱 있던 30년 연차의 사람들을 보면 두렵다. 내 30년 후가, 저렇게 한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하는 일 없이 월급만 따박따박 받아가는 한심한 사람이라면 어떡하지? 난 그런 내 자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동료들은 좋다. 내가 즐겁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이번에 전보 신청을 하려고 하다가도, 다음으로 미룬 가장 큰 이유다. 평생을 일하면서 이렇게 마음 맞는 동료들과 일할 수가 있을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또래 친구들이랑 대학생활 하듯 어울리고 있다. 나이가 비슷하고, 어쩌다 보니 살아온 삶의 궤적도 비슷해 고민의 결 또한 비슷하다. 이 친구들이 없다면 회사생활이 많이 괴로울 뻔, 그리고 외로울 뻔 했다.
왜 시간은 없는걸까. 3주전 주말, 친구들과 부산으로 불꽃놀이를 보러 가다가 용인즈음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생애 처음 당한 교통사고였다. 처음 뒤에서 차가 들이받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아, 이대로 인생이 끝인건가 싶었지. 코에선 코피가 났다. 충격에 한동안 손이 떨렸다. 다들 처음 겪는 상황에 보험처리를 하는것부터 미숙했다. 뒷 트렁크는 완전히 망가져 열리지도 않는 상태였다. 차 앞머리에선 부동액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고를 낸 뒷 차 주인 아저씨는 별로 안다친게 아니냐고 깐족거렸다. 어려보이는데 나이는 몇인지도 물었다. 그날 다같이 수원의 한 한의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주말 내내 누워있었다. 그리고 직접적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병원을 가지 않았다. 대학원생인 친구는 일주일에 세번씩 병원치료를 받았는데, 이상하게 난 시간이 나지 않았다. 일주일은 생각보다 짧았고, 병원에 가려고 결심한 날엔 이상하게도 무슨 일이 생겼다. 주변에선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심하기 때문에 지금 치료를 잘 받아둬야한다고 겁을 줬지만, 당장 부서진 데가 없으니 병원으로 향하는 것도 큰 일로만 느껴진다. 안전벨트를 해야한다, 뒷자리에 앉더라도.
새로운 일을 준비한다.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 가만히 앉아서 객관식 시험 준비하는 일이라곤 하지만, 유인도 절실함도 부족하다. 회사 내에서도 새로운 곳에 지원하고 있다. 아무튼간 난 배우고 발전하는 편이 좋다.
첫눈이 내린 월요일이다. 피로감은 목요일쯤 된 월요일이다. 내일은 꼭 병원에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