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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틀 Oct 11. 2024

602호

  아무리해도 진영은 골프공을 날리지 못했다. 10번 중 한번만 골프공에 맞고, 나머지는 땅을 굴러갔다. 진영은 레슨비를 아까워하는 남편을 떠올렸다. 한번 배워서 쭉쭉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진영은 자신의 운동신경을 탓했다. 끙끙거리는 진영을 보며 뒤에서 골프 연습하던 수희가 물었다. 

  “언니는 누구 패고 싶은 사람 없어요? 찰싹 때리듯이 쳐봐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진영은 순간적으로 남편을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며 드라이버를 휘두르자 골프공이 높이 떠서 멀리 날아갔다. 절대로 뜨지 않을 것 같았던 공이 떴다. 드라이버를 잡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멀리 보낸 공이었다. 진영의 입에선 슬며시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이스 샷!”

  공이 뜨자 수희가 말했다. 수희는 골프장에서 알게 된 동생이었다. 진영보다 3살 아래였고, 901호에 살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오가며 눈인사만 나누던 사이였는데, 골프장에서 만나며 친해졌다. 수희의 골프구력은 진영보다 1년 먼저였다. 골프는 구력이 곧 실력이 되는 운동이기도 했다. 운동신경이 발달한 사람들은 좀 다르지만, 대체로 구력이 오래될수록 골프 실력도 좋았다. 

  진영은 수희보다 골프 구력이 짧기도 했지만, 레슨을 받아도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다. 운동신경도, 감각도 둔한 편이었다. 게다가 진영은 이 작은 공을 긴 채로 휘두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진영이 골프를 멈추지 않고 연습하는 이유는 수희 덕분이었다. 골프 연습 후 수희와 마시는 커피 한잔과 수다가 진영의 힐링 타임이었다.

  “언니 누굴 생각한 거예요? 혹시 형부? 하하.” 수희가 웃으며 물었다.

  “글세. 누굴까?” 진영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눈치 빠른 수희가 남편을 이미 콕 찍었지만, 굳이 남에게 남편을 들먹이고 싶지 않았다. 


  진영이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3개월 전이었다. 남편이 선심 쓰듯 골프레슨비를 대주었는데, 이유는 부부동반 골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제약회사 영업직이었다. 거래처 사람들과 종종 라운딩을 다녔는데,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모르는 사람과 조인하는 것보다 부부동반 라운딩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진영은 남편의 회사 생활에 자신까지 이용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생활비만 빠듯하게 주던  남편이 레슨비도 주고, 골프채도 사주는데, 어떻게 보면 공짜 아닌가 싶은 마음도 있었다. 부부끼리 무슨 공짜냐 싶겠지만, 남편의 성향을 볼 때 골프레슨비는 분명히 공짜였다. 공짜였기 때문에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결혼생활을 하면서 생활비를 풍족하게 준 적이 없었다. 아이에 관해서는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었지만 다른 비용은 꼭 질문을 했다. 

  “꼭 필요한 거야?”

  진영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답하면 한 번 더 질문했다.

  “얼마야?”

  그 두 가지 질문을 성실히 답변하고 나면 남편은 돈을 주는 대신, 물건을 사주었다. 아니, 물건을 구해주었다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남편은 중고거래를 좋아했다. 그의 핸드폰에선 늘 ‘당근’이라는 알람이 울리곤 했다. 진영의 운동화도, 얼마 전 고장 났던 세탁기도 모두 당근마켓에서 남편이 사준 것이었다. 특히 ‘나눔’이라는 키워드가 뜨면 남편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나눔으로 소소한 것들을 집으로 가져왔다. 소소한 것들에는 찻잔 세트, 밀폐용기, 핸드폰 고리 등이 있었다. 집에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점점 쌓여갔다. 남편이 나눔으로 가져온 물건을 몰래 버리는 것이 진영의 일상 중 하나였다. 

  

  얼마 전에는 냉장고가 작동되지 않았다. 결혼생활 10년이 넘어가니 가전제품도 하나 둘 씩 망가져가는 것이었다. 진영은 냉장고야말로 새 것으로 장만하고 싶었다. 용량 큰 투 도어로 사고 싶었다. ‘이번에도 설마 당근?’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남편은 냉장고를 뜯어보더니 고칠 수 있겠다고 했다. 부품 몇 개를 가져와 몇 시간동안 끙끙대던 남편은 정말로 냉장고를 고쳤다. 냉장고에 불이 들어오고 다시 작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고쳤다!” 남편이 환호했고, 진영은 실망했다.

  남편은 중고거래를 하면서 진영에게 시키는 일이 많았다. 몇 시에 거래를 하기로 했으니 나가서 물건을 받아오라던가, 집에 있는 물건을 포장해서 내놓으라던가 하는 것들이었다. 진영은 외출했다가도 중고 거래를 위해 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 지금 거래해야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는 남편의 독촉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집에 있는 사람이니까’라는 너그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자기 할 일을 자신에게 시키는 것이 짜증나기도 했다. 최근엔 엘리베이터 교체공사로 인해 6층까지 걸어서 올라 다녀야 했는데, 물건까지 옮겨야 하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변운 물건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무거운 물건은 욕이 절로 나왔다. 아파트 입구에 세워두고 퇴근할 때 가지고 올라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누군가 가져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는 전자레인지를 만원에 사서 가져오는 길이었는데, 중간에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미니 전자레인지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한층, 한층 올라올 때마다 남편 욕을 얼마나 했는지. 그때 생각을 하니 드라이버가 슝슝 소리를 내며 골프공을 잘 때렸다. 


  진영은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었다. 결혼 전 진영은 학습지 선생님을 했었다. 대학교 졸업 즈음에 몇 군데 이력서를 넣긴 했지만, 면접에서 매번 탈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영은 회사를 별로 다니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이 모두 공무원이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집을 비우며 일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자유로운 프리랜서 직업을 원했고, 그 중 하나가 학습지 선생님이었다. 문제는 늘 밤늦게까지 일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회원관리 압박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님을 상대하는 일도 너무 피곤했다. 수입도 변변치 않았다. 진영이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것이 아니었다면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수입이었다. 진영은 결혼하면 학습지 선생님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던 차였다. 친구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진영이 일을 계속 하기를 바랐지만, 진영은 별 미련이 없었다. 살림을 잘 할 자신이 있었고, 아이를 자기 손으로 키우고 싶었다. 마침 허니문베이비로 아이가 생겼고, 결혼 후 처음 몇 년간은 별 갈등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아이를 다른 사람 손으로 키우지 않으니 남편도 진영의 선택이 잘한 것이라고 동의했다.

그러나 아이가 커가면서 교육비가 증가했고, 남편은 나이가 들어가며 회사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했다. 그 즈음, 남편은 ‘혼자 번다’던가 ‘외벌이로는 서울 집 사기 힘들다’던가 하는 말을 자주했다. 진영은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일을 하라는 이야기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멀리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남편의 압박은 더 심해졌다. 동료의 와이프가 이번에 연봉을 2천만 원이나 올려서 이직을 했다고, 둘이 벌어서 금세 서울로 진입할 수 있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흘렸다. 

  다시 일을 하는 것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커가면서 손은 더 바빠졌다. 그나마 아이가 있을 때는 남편에게 좀 당당했다. 시간적 여유는 없었고, 아이와 함께 있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다행히 아이는 공부를 잘했고, 특목고에 진학했다. 아이의 공부로 진영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느낌도 잠시, 진영은 아이가 빠져나간 시간을 무엇으로 메꾸어야 할지 몰랐다. 주말에 학원으로 라이딩하는 것 빼고는 평일은 시간이 펑펑 남아 돌았다. 당근마켓이나 쿠팡 단기 알바를 알아보긴 했으나 힘든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학습지 선생님을 다시 해볼까 싶었지만, 아이들 학부모를 상대하기 싫었다. 힘든 일도 싫었고, 사람 상대하는 것도 싫었다. 일하기 싫은 이유만 생각났다. 남편의 눈치가 치사해서 당장 돈을 벌러 나갈까 싶다가도 그냥 견디자, 쪽으로 매번 기울었다. 치사와 고민을 반복하는 사이 골프가 진영의 인생에 들어온 것이었다.  

  남편은 진영의 레슨비를 대주고, 골프채와 골프 신발을 사주었다. 물론 모두 중고였다. 레슨도 다른 사람이 쓰다가 사정으로 못 쓰게 되어 당근마켓에 내 놓은 것을 샀다. 레슨도 중고거래가 된다는 것을 진영은 그때 처음 알았다. 50%나 할인 된 금액이고, 싸게 샀다면서 남편이 몹시 뿌듯해했다. 진영도 만족했다. “꼭 필요해?” 라던가 “얼마야?”라는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남편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지만, 너무 재미있는 운동이었다. 진영은 하루도 빠짐없이 골프 연습을 했다. 진영은 골프를 하는 시간동안은 잠시 고민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작은 공을 맞추기 위해 애쓰면서, 자신의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고, 어느 날은 잘 맞고, 어느 날은 잘 맞지 않았다. 남편 같았다. 운동신경이 둔해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다 한 번씩 맞는 공을 보면 희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결혼도 그런 맛에 계속 같이 사는 것인지도 몰랐다. 10가지가 안 맞지만 단 한 가지 때문에 사는 것, 그것이 결혼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진영은 목표가 생겼다. 골프를 가르칠 수 있는 레슨프로 자격증을 따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습지 선생님 경력도 있으니 가르치는 것은 잘할 자신이 있었다. 학부모 상대하지 않아도 되었고,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받을 일도 없었다. 바른 자세가 안 되는 것은 본인의 연습부족 탓이니까. 


  진영은 골프의 재미에 빠지게 되면서 유튜브로 연구해보기도하고, 골프 경기를 챙겨서보기도 했다. 골프를 배우게 되면서 남편과 대화도 조금 달라졌다. 그 전에는 생활비 혹은 아이 이야기만으로 점철된 대화였다. 서로의 의무와 책임을 묻는 대화였다면 골프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화로 바뀌었다.  

“요즘 드라이버 잘 돼?” 남편이 물었다. 며칠 전, 드라이버가 잘 안 맞아서 고민이라는 말을 했던 터였다. 

드라이버를 칠 때 당신 생각을 한다고,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진영은 그냥 조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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