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뒤면 시아버지 생신이었다. 태주는 이번엔 참석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어떤 핑계를 대야 할까. 그러다 생각이 났다. 태주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첫째는 고등학생, 둘째는 중학생이었다. 태주는 아이들 핑계를 댈까 싶었다. 아마도 시아버지 생신이 있기 전의 주말에 할 것이고, 아이들은 기말고사 준비로 바쁠 것이다. 게다가 학원에선 주말에 특강을 한다고 연락이 왔었다. 굳이 시아버지 생신을 챙기자면 밥을 먹고 학원에 가거나, 혹은 학원에 다녀와서 저녁에 모임을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태주는 ‘굳이’ 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태주는 시아버지가 싫지는 않았다. 10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팔이 안으로 굽기는 해도 비상식적으로 태주에게 며느리 역할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태주가 싫은 것은 시누이였다. 태주는 시누이를 볼 때마다 저렇게 착한 시부모님 밑에서 어떻게 저런 딸이 나왔을까, 생각하곤 했다. 시누이의 이름은 연주였다. 태주와 연주. 어떻게 보면 자매같은 돌림자를 쓰는 이름으로 친한 사이로 지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나이 때문이었다. 태주의 남편은 3살 연하였다. 연주는 남편의 두 살 많았다. 그러니까 남편의 누나였고, 태주보다는 한 살 아래였다.
결혼 초기 연주는 태주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결혼 후 처음 방문한 시댁에서 밥을 먹고 일어설 즈음이었다.
“올케, 설거지 좀 해. 내가 과일 깍을 게.”
태주는 순간 멈칫했다. 결혼 전에는 서로 존대를 했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난 뒤, 연주의 태도는 손위 사람이었다. 음식을 시어머니가 준비했기 때문에 본인이 설거지를 할 생각을 하긴했지만, 연주가 설거지하라는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나름 자기도 과일을 깍겠다고 말을 했으니, 역할 분담을 하는 말이었지만 지시와 반말이 거슬렸다. 태주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대다가 “네”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부터였다. 연주에게 반말을 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아니, 용기가 없었다고 해야 맞았다. 손위 시누이와 며느리라는 관계가 용기를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했다.
태주는 속으로 스트레스를 쌓았다. 더군다나 둘 다 3월생으로 딱 1년 차이가 났다. 태주가 겨우 걷기 시작했을 때, 연주는 갓 태어난 아기였을 것이다. 태주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밟아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달랬다.
시댁에서 다 같이 밥 먹을 때 큰딸이 물었다. 당시 큰 딸은 초등학생이었다. 한 참 학교에서 가족관계와 호칭을 배울 때였다.
“엄마는 왜 고모를 형님이라고 불러? 그건 남자 형제를 부를 때 쓰는 호칭 아니야?”
딸의 질문에 태주는 잠시 멈칫 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연주가 잘못한 것이라고, 서로 존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떨어지게 할 용기가 올라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열상 내가 위이기 때문이야.”
연주는 남편의 누나이고, 집안의 서열상 자기가 위이기 때문에 반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반박을 했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분했다. 분함이 목을 타고 넘어가 밥맛을 뚝 떨어뜨렸다.
태주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 혹은 남편, 누군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연주의 반말을 문제 삼지 않았다. 들어도 못들은 척하는 것인지, 당연한 것인지. 태주는 시누이 때문에 남편과 늘 다툼을 했다. 명절엔 시누이를 보고 가라는 시부모님의 성화에 늘 눌러 앉았다. 가족끼리 모이는 거, 1년에 몇 번이나 된다고. 그 '몇 번이나'에 태주의 친정식구들은 포함 되지 않았다.
태주는 네이버에 한 살 아래 시누이의 반말로 검색해 봤다. 남편의 누나이니 올케한테 반말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과, 서로 존대를 써야 한다는 의견이 반반이었다. 반말이 당연하다는 쪽은 결혼하면 남편의 서열을 따라야하니 반말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게 싫으면 이혼을 하거나 우리나라를 떠나라고 하는 댓글들도 있었다. 도대체 어느 시대 사람인건가. 버릇없음이 유교사상으로 구시대적 예의로 돌변하는 사태를 계속 당해야 하는 것인가.
당연히 서로 존대해야죠. 버릇없네요.
그 집 자식 교육 잘못됐네요.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ㅉㅉ
인성이 쓰레기네. 응대를 하지 마세요.
욕하는 댓글을 보면서 태주는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말을 익명의 누군가가 시원스레 질러주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댓글을 하나 발견했다.
님도 반말 하셈. 서로 셈셈하는게 좋지 않겠음?
태주는 이거다 싶었다. 그래, 나라고 반말 하지 말라는 법 있어? 하지만 이미 17년이나 존대를 해 왔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반발심과 증오심, 분노가 가슴 속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용기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태주는 용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저축하듯 차곡차곡. 연주에게 반말하는 상상을 하면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인가 해보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연주에게 반말하는 상상을 했다. “형님, 왔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형님이라는 호칭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야” 라거나 “연주야”라는 호칭은 나오지 않았다. 태주가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은 문장의 마지막 마침표 까지만 이었다.
17년간 몸에 밴 존대 습관을 얼른 빼 버리고 싶었다. 길을 걷다가도, 계단을 오르내리다가도 중얼중얼 연습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엘리베이터 공사로 계단을 내려가던 중, 발을 헛딛으면서 넘어졌다. 1층에 거의 내려왔을 즈음이었고, 계단이 3개쯤 남아있을 때였다. 계단 손잡이를 잡고, 중심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발목이 시큰거렸다. 더는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한쪽 발로 절뚝거리며 간신히 6층으로 올라왔다. 별로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발목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다음 날 병원에 갔을 땐, 골절 진단을 박고 뼈에 철심까지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회복까지는 6주 이상 걸릴 것이라고 했다. 처음 목발을 집으면서 태주는 당장 엘리베이터 공사로 인해 오르내려야 계단이 떠올랐다.
태주는 이 모든 것이 연주 탓 같았다. 처음 불평은 ‘’에서부터 시작했다. 계단에서 왜 미끄러졌나, 왜 주의 깊게 계단을 내려가 못했나, 무슨 생각을 했더라? 같은 생각으로 이어지다보니 마지막에 연주가 있었다. 연주가 아니었다면, 연주가 반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연주를 상대하는 상상을,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에 좀 더 집중했을 것이었다.
발목이 이 모양이니 시아버지 생신에는 가지 못할 것이었다. 태주의 사고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전화했고, 시아버지가 전화를 했다. 오지 말라고, 그깟 생일이 뭐가 중요하냐며, 얼른 나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시부모님만 아니었더라면 참 좋은 분들이었다. 사람 배려할 줄 알고, 남에게 쓴 소리 못하는 분들이었다. 그런 점잖은 면이 많은 분들한테 연주 같은 사람이 자식으로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한편으로는 남에게 쓴 소리 못하니 자식이 저렇게 예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부모님의 생신에 가지 못한 것은 의도치 않게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연주에게 반말할 수 있는 기회는 잃었다.
시부모님께 연락을 받은 후, 연주에게 카톡이 왔다.
- 올케, 얘기 들었어. 좀 괜찮아?
역시나 반말이다. 태주는 ‘이럴 땐 문자가 아니고 전화를 해야지. 그게 예의 아니겠니?’라고 속으로만 말했다. 그러다 이내, “하긴 우리가 전화까지 할 사이는 아니지”하고 이내 체념했다. 결혼 후 태주가 잘 배운 것이 있다면 빨리 체념하는 것이었다.
태주는 연주의 문자를 받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답변을 보낼까 말까 반말로 할까 말까 등으로 몇 분을 소비했다. 카톡을 읽음 표시가 되었으니 답변을 기다릴 것이다. 태주는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안에 숨어있던 용기를 불러냈다.
- 응. 괜찮아.
전송버튼을 누를 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움 버튼을 누르고 존대를 쓰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핸드폰을 얼른 닫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렇게 쫄 거면 그냥 존대를 쓸 걸 그랬나, 당장 전화가 오면 어떻게 대답할까? 등의 상상을 했다. 계단을 넘어졌을 때 연습했던 반말을 다시 입으로 중얼거려보기까지 했다. 아주 작은 습관을 고치는데 이런 노력이 필요해서야. 이런 생각을 하며 태주는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카카오톡에서는 1이라는 숫자가 사라졌지만 대답도 오지 않았다. 태주는 불안과 통쾌함의 경계에서 연주의 대답을 기다렸다. 20여분이 지난 다음 연주의 답이 왔다.
- 다행이네.
짧았다. 평소의 연주라면 엘리베이터 교체공사 때문에 힘들었겠다는 등, 병원은 어떻게 다니냐는 등의 말을 했을 것이다. 연주에겐 그런 면이 있었다. 태주가 필요할 때만 연락해서 필요한 말만 하고 끊을 때, 연주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종종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하곤 했었다. 태주는 잠시 ‘조금 참을 걸 그랬나’하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아니야,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정리해야해’라고 다짐했다. 필요할 때 필요한 행동을 하는 것은 태주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태주는 다시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어 카톡을 보냈다.
- 나이 들어서 그런가 살짝 삐끗 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치료해야 하네.
‘나이 들어서’라는 머리말을 일부러 강조하듯 보냈다. 이번엔 꽤 오랜 시간 답이 없었다. 태주는 이제 연주랑 대화할 일은 별로 없겠구나 생각했다. 서운하면서도 속이 후련했다. 연주가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할 때조차도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었으니까.
잠시 뒤에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누나가 사과 한 박스를 보내겠다네. 당신 다쳤다고, 먹고 힘내래.”
“그래? 고맙네.”
태주는 남편에게 연주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를 봐서 이야기하던지, 가족 모임에서 반말하는 태주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었다. 그동안 방관했던 남편과 시댁식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 아니,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한번 시작했으니 더는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태주는 스스로가 독립투사 같은 심정이었다. 시댁의 서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독립투사!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누나도 참, 그냥 당신한테 직접 전화하면 될 걸. 나중에 누나한테 고맙다고 전화 한통 해 줘.”
“응. 알았어.”
태주는 남편의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로 전화할 수도 있었지만 전화하지 않았다. 아니 전화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 문자 말고 육성으로 터지는 반말까지는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연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전화를 했겠지. 그런데 왜 하필 사과일까. 사과를 생각하자 슬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태주는 거실 테이블에 핸드폰을 놓고 쇼파에 몸을 기댔다. 잠시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낮잠을 자기로 했다. 12월의 해가 거실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추운 날씨 속, 거실 한 가운데가 몹시 따뜻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