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겸재 정선 기획전
지루하고 우울한 날이 계속되면 초록의 무대를 가진 미술관 여행을 떠나보세요. 5월의 자연은 긴장을 완화시키고 활력을 줍니다. 연두와 초록의 숲 '호암미술관'으로 나들이 어떤가요?
삼성문화재단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공동 개최하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대규모 기획전이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정선의 대표작 165여 점이 출품되며 진경산수화는 물론 산수화, 인물화, 화조영모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통해 정선의 회화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이다.
도심을 벗어난 미술관은 마치 여행하듯 떠난다. 아이들이 다 커서 이제 에버랜드에 올 일도 없어 정말 오랜만에 용인 나들이다. 계절의 여왕답게 곳곳에서 토해내는 신록의 눈부심은 여행하는 설렘을 갖게 한다. 미술관 입구로 들어서자 친숙한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 조각 "마망'(엄마라는 뜻)이 저 멀리서 보였다. 미술관 정원에는 연두와 초록의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찬조 출연한 철쭉도 존재감 뿜뿜~
호암미술관은 1982년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만든 사립미술관으로 그는 30여 년간 수집한 한국 미술품으로 미술관을 설립했다. 40년이 넘는 미술관의 역사는 전통 정원 '희원'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2만여 평의 넓은 정원에는 꽃과 나무의 자연미와 더불어 정자, 연못, 석단, 담장 등 전통미, 석탑, 석불, 벅수 등 고미술품의 우아함이 공존한다.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좋은 한국의 미가 돋보이는 미술관이다.
5월의 자연이 내뿜는 연두와 초록색은 심리와 정서에 영향력을 주는 색상이다.
초록은 안정감과 평온함, 균형과 조화, 회복과 치유의 색이다. 긴장완화, 집중력 향상, 감정적 안정감을 갖게 해 준다. 연두는 활력과 새로움, 밝고 명랑한 에너지를 주어 우울한 기분을 회복하고 창의적 사고를 촉진시켜 준다.
야외에 나와 햇빛을 쐬고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함이나 우울함은 충분히 치유된다. 자연의 색은 지친 인간을 보듬고 안아준다.
1부 '진경에 거닐다'에서는 정선을 대표하는 진경산수화, 2부 '문인화가의 이상'에서는 진경산수화 외의 관념산수화, 고사인물화, 화조화와 초충도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정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5월 6일까지 전시되었고, 5월 7일부터 6월 29일까지는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摠覽)으로 작품이 교체되었다.
연두와 초록은 없지만 정선의 그림에는 산이 많이 등장한다. 먼저 <인왕제색도>의 모습이다. 고서화 보호를 위해 며칠 전 휴식기에 들어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사진으로라도 다시 봐야 할 작품이다. 인왕산의 비 갠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적묵법(먹을 반복해서 덧칠)을 활용하여 바위의 중량감과 자연의 기운을 표현했다.
76세의 정선이 평생을 사귄 벗이었던 이병연이 병에 걸려 위중해지자 그의 집을 방문하여 그렸다고 한다. 인왕산의 기암괴석을 검게 그리고 바위 틈새를 흰 선으로 표현해 사실감을 더한 진경산수화이다. 오른쪽 아래 보이는 지붕은 친구 이병연의 집이다.
다음은 <금강전도>, 금강산의 전경을 그린 대작으로 금강산을 실제로 답사한 후 그린 그림이다. 금강산은 수천 개의 봉우리가 장관을 이룬다. 봄에는 산수가 수려해서 금강산이라고 불리고 여름에는 녹음이 물들어 봉래산이라고 했다. 단풍이 아름다워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기암괴석이 잘 드러나 개골산이라고 했다. 금강전도는 겨울 개골산의 모습이다.
내금강의 아름다운 실경을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전체적으로 원형구도이다. 마치 드론으로 촬영한 것처럼 위에서 내려다 본모습을 그렸다.
<인왕제색도> 대신 전시된 <풍악내산총람>의 모습이다.
<풍악내산총람도>는 채색을 가장 많이 사용하여 가을 내금강의 모습을 그렸다.
정선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실경을 중요하게 여긴 화가였기에 직접 보고 느낀 풍경을 그리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 금강산, 인왕산, 한강, 북한산, 토함산, 설악산 등 다양한 명승지를 직접 여행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정선이 많은 곳을 다니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관직 수행도 한몫했다. 청하현감(지금의 경북포항 일대), 양천현령(지금의 서울 강서 일대)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그 지역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릴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이병연을 비롯한 문인들과 풍류여행을 즐겼다. 자연 속에서 시, 서, 화를 주고받으며 함께 즐겼고 이러한 예술적 경험이 그림에 반영되었다.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조용히 방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뭔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존재의 공허함과 마주하게 된다. 그 공허함,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느낄 때가 바로 지루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락, 일, 대화, 여행, 목표 설정 등으로 자신을 바쁘게 만들며 ‘지루함’을 피하려고 한다. 내가 그렇다.
나의 지루한 일상을 치료해 주는 최고 보약은 '여행'이다. 여행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무기력해진 감정을 끌어올린다. 일상의 지루함은 낯섦으로 씻어내고 우울함은 새로운 풍경으로 덜어낼 수 있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다른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라고 한 로렌스 블록의 말처럼 여행은 '나'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40여 년간 직장이었던 학교를 떠나며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오랜 세월, 계속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지루하고 또 지루했다. 퇴임 후 낯섦과 새로움을 찾아 여행을 다니고 이것저것 지루함을 덜어낼 일을 찾다 보니 어느덧 '여행작가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퇴임 후에는 학교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다던 내가 내 발로 다시 학교를 찾은 것이다.
'여행작가학교'는 매년 봄, 가을 학기에 오프라인으로 운영되며 3개월 코스이다. 그동안 배출한 인원이 1300여 명에 달하고 책을 출간한 정회원들도 많았다. 글쓰기 기초와 기술, 사진의 기초와 기술, 취재의 기술, 문학기행, 스토리텔링 등이 주요 강좌이다. 정회원들이 강사이신데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여행 책들을 출간하시고 방송도 출연하시는 등 이력이 화려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실습 여행을 통해 사진과 글을 제출하여 멘토 작가에게 자신의 글과 사진을 품평을 받았다.
첫 번째 실습은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으로 떠나는 봄소풍'이었다. 세검정에서 출발하여 한양의 비밀정원이었던 백사실 계곡, <커피프린스 1호점> 산모퉁이 카페가 있는 부암동 일대를 걸었다. 한양 4 소문 하나인 창의문과 윤동주 문학관, 겸재 정선이 화폭에 담았던 수성동 계곡, 박노수 미술관으로 하루 종일 이어지는 여행이었다. 올해 처음으로 봄꽃을 서울에서 보았고, 새로운 풍경과 낯선 사람들과의 동행은 설렘이었다.
함께 해 주신 작가님들이 중간중간 지역 설명과 자세히 보아야 할 것, 사진이 잘 나오는 지점, 사진 찍는 각도 등을 설명해 주셨다. 실습 후 이어진 통인시장 안에서의 단체 회식으로 어색했던 조원들과도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여행은 쓴맛과 단맛을 모두 가진다고 했는데 실습이 달콤했다면 글쓰기는 완전 쓴맛이었다. 그 긴 여정을 한 편의 글로 녹여 담아내기는 너무 버거웠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멘토 작가님에게 사진 한 장과 글을 제출하였다. 그다음 주 44명의 사진을 같이 보며 작가님의 품평을 듣는 시간. 하나하나 설명을 들으니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좋은 작품이 되는지 사진 초보가 크게 한 수 배울 수 있었다. 똑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새로운 배움이었다. '오래 머물고 나만의 시선을 보여줄 것' 마음에 새겼다.
글쓰기 품평은 4개 조로 나뉘어 배정된 멘토 작가와 함께 했다. 조원들의 글을 읽으며 잘된 표현과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지도가 있었다. 우리 조에는 이미 책을 두 권이나 출판한 작가도 있어서 같은 곳을 여행하고 쓴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는 것은 큰 도움이었다. 멘토 작가님의 지적은 예리했고,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글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2차 실습 여행은 수원화성 일대, 3차는 덕수궁과 정동 일대였다. 슬렁슬렁 다니던 곳들이었는데 여행작가의 시선으로 다니다 보니 봐야 할 것과 담아야 할 것이 많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이다." 나의 시야도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이제 세 달의 시간이 흘러 문집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 종강을 남겨두고 있다. 이제부터는 선배들과 동아리를 통해 특색 있는 여행에 합류하여 다닐 생각에 두근거린다.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서울을 오가는 시간은 힘들었지만 이 또한 기분 좋은 일탈이 되었다.
1차 실습 때 갔던 <세검정>을 호암 전시실에서 정선의 작품으로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내가 실습 때 찍은 <세검정>의 현재 모습은 아래와 같다.
아파트도 들어서고 그림과 비교해 보면 옛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복원된 세검정 정자가 같은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인조반정을 계획하던 서인 세력들이 이곳에 모여 칼을 씻었다는 이야기에서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도 있었다. 그림을 보노라니 봄소풍에서의 수성동 계곡이 떠올랐다.
내가 찍은 <수성동 계곡>과 비교하니 기린교가 선명하고 그림에서는 폭포가 흐르는 듯하다.
기린교는 수성동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로, 1960년대 아파트 건설로 인해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다시 발견되어 복원하였고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미술관에 와 보니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갔던 실습 여행이 정선의 발자취를 따라다닌 거였음에 놀랍고도 신기했다. <세검정>에서는 표현의 섬세함이 <수성동>에서는 간략하면서도 강렬한 붓터치가 돋보였다.
정선이 산수화만 잘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전시된 그림 속에 있던 매미, 오이를 등에 업은 고슴도치, 개구리, 방아깨비를 확대해 보니 특징을 잘 살린 초충도의 세밀한 묘사가 탁월하고 귀엽다.
호암미술관은 금강산처럼 계절별 이름은 없지만 벚꽃 피는 봄, 신록이 아름다운 여름, 단풍 드는 가을, 눈 오는 겨울 모두 금강산처럼 색다르다. 계절 바뀔 때마다 여행처럼 다녀오고 싶은 곳이다.
매일 반복되는 날로 지루하신가요? 툭툭 털고 집을 나와 미술관으로 여행을 떠나 보세요.
긴 호흡 ㆍㆍ 느린 걸음 ㆍㆍ 천천히 ㆍㆍ 그림과 자연 속에 있다 보면 치유와 회복이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