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제주 이왈종 미술관
인생이라는 무게가 너무 무거운가요? 삶을 가볍게 내려놓고 싶은 날은 행복한 마음을 갖게 해 주는 이왈종 작가의 그림 어떠신가요?
제주 올레길 6코스 쇠소깍에서 출발하여 정방폭포 근처로 가다 보면 몸이 지쳐 걷기가 어려워질 무렵 '왈종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왈종미술관은 제주의 자연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개인 미술관이다.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는 밝고 유쾌한 작품들이 많다. 걷기를 멈추고 잠시 쉼을 얻고 나면 다시 걸을 수 있는 기운이 생겨 6코스를 거뜬히 완주할 수 있었다.
서귀포에 정착한 이왈종 화백은 자기가 살던 집을 헐어내고 원하는 작업실을 겸한 미술관을 짓고자 그가 도자기 모습의 모형을 만들었다. 창의적인 설계가 돋보인다.
이 모형을 토대로 스위스의 건축가 다비드 머큘러와 한만원 건축설계사가 공동으로 건축한 미술관은 조선백자 모양으로 만들어져 독특함에 신기함을 더했다. 앞으로는 섶섬, 범섬, 문섬이 보이는 바다가 펼쳐지고 뒤로는 한라산이 보여 미술관 자체가 작품이 되는 곳이다. 낮과 밤의 모습이 색다르게 아름답다.
그의 작품에는 특이하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골프와 관련된 그림이 많았다. 작가가 아마도 골프를 무척이나 좋아했나 보다. 자나 깨나 골프 생각에 누워서도 골프채를 만지고 있는 그림의 주인공이 작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봄꽃이 화려한 날 벙커에서 샷을 하는 사람도 보이고 캐디와 카트도 보인다. 새들도 날아다니고 꽃들과 나무들도 밝고 경쾌하다. 버디를 했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호탕하게 웃는 사람은 웃음을 짓게 한다.
해저드로 들어간 볼을 찾는 사람들, 그린을 닮은 한라산도 등장하고 동백꽃과 귤나무도 보인다.
골프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어설픈 골프 입문기가 생각난다.
추운 걸 싫어하는 친한 친구가
"퇴임하면 겨울마다 따뜻한 나라에 가서 같이 골프치자."하고 나를 꼬드겨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골프.
한 십여 년 전 나는 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친구 넷 중 나만 골프를 할 줄 몰라 친구들은 빨리 골프를 배우라고 성화였다. 땡볕에서 하는 바깥운동을 싫어하는 나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으로 미뤘다. 승진을 하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읍에 하나 있는 골프장에 등록했다. 그때는 10월이었는데 친구들은 좋아라 하며 1월 초에 머리를 올려 준다고 제주도에 가자고 들썩거렸다. 안 된다고 하니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나는 잘 칠 때 가고 싶었지만 친구들의 성화에 얼떨결에 비행기표를 끊고 말았다.
학교 사택에 살았던 나는 금요일은 집에 와야 해서, 출장이 있어서, 약속이 있어서 하며 연습장에 못 가는 날이 많았다. 아니 재미가 없으니 안 가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코치가 유연성 떨어지는 나이 많은 몸을 돌려서라도 자세를 잡아 주며 스윙 폼을 제대로 만들어 주길 바랐는데 그러기엔 너무 어린 청년이었다. 멀찍이 말로만 설명하다 보니 내 맘대로 인 엉성한 폼이 정착되었고 실력도 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11월 중순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 7번 채 외에는 만져보질 못했다. 다급해진 마음에 시간이 나는 날은 세 시간씩 연습했다. 과도한 연습은 역효과를 불렀다. 어깨와 팔에 엘보가 오고 통증이 심했다. 이 나이에 내가 왜 이 재미없는 것을 시작했을까 후회 막급이었다.
코치에게 드라이버를 배우게 해달라고 졸라 몇 번 휘두르고 나니 제주 가는 날이 다가왔다. 나는 너무 가기 싫었다. 무거워진 마음은 두통과 소화불량을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안 갈 수 있을까?' 궁리를 해 봐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장모님이 돌아가셔도 골프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룰이 있다고 하니 도저히 이 수렁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친구들 말만 믿고 3개월이면 되는 줄 알고 승낙한 내가 바보였다. '따뜻한 봄이면 얼마나 좋을까? 연습할 시간도 있고, 퍼팅도 연습해 보고, 다른 아이언과 우드도 연습해 보고 가면 좋았을 걸. 한 번도 연습 안 한 채가 많은데 걱정이 많아졌다. 게다가 추운 1월에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 치고 나갈 것을 나는 두세 번씩 치다 보면 얼마나 지칠 것인가, 동행자에게 민폐가 따로 없고 망신당할 것이 분명했다. 후회를 해봐도 소용없는 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드디어 출발하는 1월 3일이 되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다가 커튼을 제치니 눈이 오고 있었다. '아니 이게 뭐람.' 날씨마저 안 도와주네. 눈 내리고 질척해진 필드는 아침이면 얼어붙을 것 같았다. 가슴이 더 답답해져 왔다. 눈발은 점점 더 거세져 앞이 안 보였다.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하고 TV 뉴스를 켰다.
'아니, 이 무슨 기적 같은 일이란 말인가? 로또 맞은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났다. 비행기가 결항이란다. 신난다. 너~무 신난다. 우째 이런 일이.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어찌 내 마음을 아셨나요?'
천재지변에 신나서 감사하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비행기 결항을 나보다 더 좋아할 사람이 또 있었을까? 친구들에게 내색은 안 했지만 아무튼 몇십 년 된 쳇증이 확 사라지는 쾌감을 느꼈다. 이렇게 나의 골프 첫 머리 올리기는 수포로 돌아갔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
골프는 힘 빼는 게 생명이라는데 유연성이 떨어지는 나이에 시작한 데다 초보라 힘껏 내려치다 보니 팔과 어깨 아파서 병원 다니기를 수십 번 했다. 급기야 회전근개 파열로 수술까지 하고, 그만두기를 여러 번 하다가 퇴임 후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3개월만 버티면 재미를 좀 알게 된다 하는데 그 시간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시작했지만 이제 늘지도 줄지도 않는 어설픈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래도 연습장 가는 시간이 즐거워진 건 큰 수확이다.
고(故) 이건희 회장의 말을 빌리면
"이 세상에 맘대로 안 되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건 골프와 자식이다."
오랜 구력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말할 정도니 골프가 얼마나 어려운 운동인가 생각 든다. 몇 년간 연습장을 다니면서 좀처럼 늘지 않는 골프는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 자신과의 싸움이다. 골프는 같이 하지만 따로 하는 운동으로 개인의 집중력과 감정 다스리기가 중요하다. 인생도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홀로 사는 삶이다. 삶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한다.
2. 완벽하지 않다. 골프에서 완벽한 마음에 드는 샷이 드물듯, 인생도 완벽한 순간이 드물다. 실수를 인정하고 연습을 통해 다음번의 기회를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3. 예측이 불가능하다. 날씨, 바람, 코스, 오르막, 내리막, 지형 등 변수가 다양하듯 인생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채워져 있다. 묵묵히 최선을 다해 극복해 나가는 수밖에.
4. 욕심을 버려야 한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골프도 힘을 빼야 잘 된다. 인생도 너무 욕심을 내면 고통과 문제가 커진다. 잘 치려는 욕심보다 즐기려는 마음이 골프나 인생에서 모두 필요하다.
그림을 통해 본 이왈종 화백은 특유의 재치와 낙천적인 마음으로 골프와 인생을 즐기신 분 같았다. <제주생활의 중도> 시리즈 중에는 골프 치는 사람들 모습을 그림으로 넣어서 스포츠라기보다 삶의 태도, 유유자적함, 중도와 연기 철학을 시각화시켜 주었다.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는 불교적인 세계관과 깊이 관련된 개념이다. ‘중도(中道)’는 균형을 유지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이왈종은 제주에서의 삶을 통해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삶의 방식을 찾았고, 이를 ‘중도적인 삶’이라 표현했다.
‘연기(緣起)’는 불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로, 모든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는 삶의 철학이다.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 존재’로 넷이 함께 맞추는 골프와도 연관 있다.
그의 그림에는 익살스럽고 엉뚱한 유머가 자주 등장하는데 예술은 꼭 진지하게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작가의 철학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오늘 하루도 너무 힘겨웠나요? 가끔은 힘을 빼고 즐겨보는 건 어떠신지요? 이왈종 화가의 유쾌하고 화려한 색채의 그림을 보면서 마음의 무게를 줄여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