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통역이란?
: 따라다니면서 하는 통역
단순히 말한다면 위 정의가 맞을 것이고, 좀 더 멋지게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수행 통역: 목적에 따라 통역 수요자와 계속 동행하면서 필요시 통역해 주는 것.
하지만 수행 통역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형식이나 정의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단일 일정 속에서도 다양한 상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고위 임원과 동행하여 출장에 간다고 생각해 볼 때, 단순히 내가 통역만 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버리는 게 좋겠다. 사전에 입력되지 않은 업무를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위 임원과 출장에 동행했을 때 위스퍼링 통역, 부스 동시 통역, 회의실 순차 통역, 서서 이동하면서 하는 통역 등 온갖 종류의 통역을 다하게 된 적도 있다. 여기에 의전은 덤이었다. 참고로 위스퍼링 통역은 통역 대상자 바로 옆에서 귓속말처럼 소곤소곤 동시 통역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짝 붙어서 조용하게 통역해야 상대방 말도 들리고 내 목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구강 청결 관리는 필수이다..
여기서 잠시, 수행 통역과 긴밀히 연관된 의전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의전은 뭔가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자연스럽게 몸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고위 임원과 함께 차를 탈 때의 내 자리, 서있을 때 그와 나와의 상대적 위치, 앉았을 때의 자리 배치, 내가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비켜가면서도 주변이 가시거리 내에 있게 하는 것, 그가 차에서 내릴 때와 탑승할 때 나의 자세 등이 그것이다.
이제 공항부터 그와 동행한다고 했을 때 통역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걸까? 우선 공항에서 그분이 내리면 인사를 하게 될 것이다. 다른 이가 있다면 짐을 대신 챙겨줄 수도 있지만 없다면 들어주지는 못해도 같이 챙겨주면 좋긴 하겠다. 시간이 남으면 라운지에 갈 것이고(그분은 당연히 비즈니스 이상이기 때문에) 거기서 일정 브리핑이나 출장의 목적을 상기시킬 것이다. 그동안 비행기 탑승시간을 리마인드 하는 것이 좋다. 탑승 시각이 되면 게이트 앞에서 헤어짐의 인사를 나눌 것이고 각자 클래스에 맞추어 탑승할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즈니스 쪽부터 내리긴 하지만 가능하면 앞쪽에 좌석을 미리 배정받고 그분의 기다림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즉, 모두가 나를 기다리는 시간은 줄이는 게 좋을 거 같다. 보통은 시간 절약을 위해 짐은 핸드캐리가 디폴트겠지만 짐이 많아 그렇지 않을 경우 사전에 짐 개수를 파악해서 분실이 없도록 하는 것도 좋겠다.
입국 심사 때는 잠시 통역이 필요하나 고민하더라도 원래 한 번에 한 명만 심사가 가능한 게 원칙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언어가 전혀 안 통하는 사람에 한해 통역사가 동행해 이를 도와줄 수는 있다. 도착해서 사전에 조율된 차량과 기사와 연락이 닿으면 해당 차량에 탑승하면 되는데, 다른 동행자가 있다면 모르지만 때로는 내가 동행해야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차량 기사가 외국인인 경우, 이들이 (눈치 없이) 말을 걸 때가 있으므로 이를 통역해 줄 때도 왕왕 발생한다.
이후 발생할 다양한 상황, 즉, 만찬이나 회의실 업무 회의, 상대 기업/관료와의 1:1 회의, 학술 대회 등에 모두 바짝 붙어서 동행하며 외국인이 주변에 있을 때에는 언제 어디서 말을 건넬지 모르니 바짝 긴장해야 한다. 1:1 회의는 발생하지 않을 확률이 높긴 하지만 기업을 대표하는 사람끼리 1:1 회의가 필요하다면, 뭔가 중요한 기밀에 대해 논할 확률이 높다. 고로 이 부분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더욱더 바짝 귀를 기울여야 할 수도 있다. 어쨌든 모든 과정에서 주변이 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상관없이 내 귀로 영어나 한국어가 인식되는 순간 뭐라 내뱉을 준비가 항상 되어있어야 한다.
갑작스럽게 일정 변경이 있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각자 다 다른 장소에서 백투백으로 미팅이 좌르륵 예정되어 있는데 갑자기 기상 악화가 발생할 수 있다. 일례로 홍콩 출장 시 기록적인 폭우로 흑색 경보가 내려져 모든 교통과 이동 및 통행이 중단되고 도시 전체가 봉쇄되어 호텔에 발이 묶인 적이 있었다. 긴급하게 호텔 미팅룸을 잡아 모든 회의를 원격으로 진행해서 들릴 것도 잘 안 들린 상태로 통역을 하게 된 적도 있다.
보통 회의 참석할 때에는 나뿐만 아니라 그 임원분도 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그 외 명함, 펜, 노트, 아이패드, 목캔디, 기타 상비약 등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별도로 이를 챙기는 자가 동행하지 않는다면 인하우스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넘어올 경우가 있으니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상대 기업 측에 전달할 기념품이 있다면 이것의 내용물에 대한 영어 설명을 미리 해두는 것이 좋겠고, 건네주는 건 임원이 하더라도 설명은 내가 해줘야 할 때가 있다. 더욱이, 이것이 지극히 한국스러운 물건이라면 영어로 현지화시켜서 설명해 주는 것이 좋겠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 당일 현지 공항에서는 모든 일정이 종료된 후이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면세점 쇼핑이나 기념품을 사면 좋을 것이다. 이런 거라도 없으면 너무나 삶이 팍팍하기 때문에. 물론 슬프게도 그분을 따라 끝까지 라운지와 동행할 때도 있을 것이다..
출장에서 복귀한 뒤에는 회사에서 출장 보고서를 요구하지 않으면 참 다행일 텐데, 때에 따라서는 통역 노트에 휘갈겨 적었던 준 암호 수준의 각종 기호를 머리를 쥐어뜯으며 해독해야 할 때도 있다. 가능하면 출장 시에 썼던 노트는 버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 덤으로 일비를 사전에 현금으로 지급받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영수증 처리나 사용 내역을 증빙해야 할 때도 있다.
위에 적었듯이 수행 통역은 단순히 따라다니면서 통역하는 것 그 이상의 작업이다. 동행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나의 존재가 동행자와의 신뢰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들리는 말만 전달하는 역할에 국한되기보다는 나의 몸과 마음이 그 사람과 상황에 항상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수행 통역을 하면서 다양한 국가를 방문하며 때로는 그곳의 주재원이 설명하는 현지 상황을 온몸으로 익히고, 가끔은 코스당 50만 원짜리 고급 요리도 맛보는 즐거움을 느끼며, 내 인생에서 절대 볼 일 없는 대기업의 대표 같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고, 견문도 넓어진다는 보람이 더 많았지만 그렇기에 그만큼의 부담과 책임이 따르기도 했었다.
내가 했던 일이 사람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한 작은 역할로부터 시작된 일일지라도 그 속에서 더 나은 소통을 위해 다양한 상황에서 발버둥 치며 꿋꿋하게 버텨낸 과정이라는 점이 수행 통역이라는 작업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지구 반대편을 넘나들며, 동분서주하며, 때로는 일주일간 세 개의 국가를 통과하며 느꼈던 성취감과 도전은,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갱신하며 통역에 대한 고통의 역치를 계속 높여주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가 살아가며 겪는 소통의 미세한 순간들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