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질환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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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먹고 살게 된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귀, 목, 입술 등 가장 많이 쓰는 부위가 가장 먼저 고장 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통역을 하면서 내 몸에 작은 질환 컬렉션을 쌓았다. 귀는 이어폰이 망가뜨렸고, 목은 감기가 가져갔고, 입술은 내가 깨물어 뜯었다.
크게 아픈 건 아닌데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엔 꽤 거슬린다. 일을 멈출 정도는 아닌데, 일을 할 때마다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냥 그런 것들이 쌓여 있다.
혹시 읽는 사람 중에서도 목 아프면 일 못 하고, 귀 막히면 불안하고, 입술 터지면 짜증 나는 이들이 있다면,
조금은 공감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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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이도염: 귀가 먼저 고장 났다
통번역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장비가 생명이라는 누군가의 조언 아래 나는 꽤 비싼 이어폰을 선물 받게 되었다. 오디오테크니카라는 브랜드의 커널형 이어폰이었다. 통역사라면 장비가 생명이라는 말답게 너무나 소리가 잘 들렸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통역 연습을 하느라 이어폰을 한쪽 귀에만 오래 꽂다 보니, 귓속이 습기로 눅눅해지고, 간질간질해지더니 결국 피가 나고 진물까지 흘렀던 것이다..!
“에이 괜찮겠지” 하며 버티다가, 결국 이비인후과에서 외이도염 판정을 받았다. 질병이 낫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리. 그럼에도 나는 당시 남자친구(현 남편)가 사준 그 비싼 헤드폰이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다. 나의 (준) 외이도염과 아까운 헤드셋이 서로 밀어내지 못한 채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한참을 더 본전(?)을 뽑고 나서야 그 이어폰은 서랍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귀를 포근히 감싸주는 소니 헤드셋을 착용하게 되었다. 물론 보통 한쪽 귀로만 인풋을 듣는 일반적인 통역 상황과는 다르게 헤드셋 착용으로 인해 귀가 두 개 다 막히는 단점은 있지만, 차라리 귀를 살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오히려 두쪽다 인풋을 듣는 게 익숙한 상황이 되었다. 처음부터 익숙해졌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일 년 넘게 소니 헤드셋을 애정하며 사용 중이다. 내 귀는 소중하니까.
#2 인후염: 목이 보내는 경고장
다음으로 내 밥줄, 목이 문제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감기가 오면 늘 목에서 먼저 신호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목이 살짝만 따끔해도 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어느 정도 내 감기 공식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날: 목 따끔.
둘째 날: 목소리 맛이 감.
셋째 날: 콧물 + 가래 파티.
통역사에게 목은 그냥 장기가 아니다. 무기다.
그래서 나도 목이라면 유난을 심히 떠는 편이다. 한 번은 저 첫째 날의 목 따끔 신호가 오길래 연차를 내고 병원에 갔다. 약을 지어준다길래 수액도 놔달라고 했다. 그러자 의사가 그거는 좀 과한 거 아닐까라고 하더라.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부터 정말 극심한 감기에 시달렸다.
아무튼 감기야 내가 컨트롤할 수 없을지언정 몸이 그것에 대항할 수 있도록 평소에도 관리를 해야 한다. 각종 비타민 아미노산은 물론이고 도라지배즙은 항상 냉장고에 대기 중. 여기에 도라지 농축액은 책상에 쌓여있고 집안 구석구석에는 용각산이 알약과 가루 형태로 구비되어 있다. 프로폴리스 목캔디는 말할 것도 없다. 기침약도 상비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걸 다 챙긴다 해도 몸이 보내는 가장 정확한 신호는 역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쉬지를 못한다. 내일도 통역 있고, 모레도 통역을 해야 한다. 이런 아이러니함이란.
#3 구순염: 입술도 나를 말린다
나는 긴장하면 입술을 깨무는 습관이 있다. 동시통역 부스 안에서도, 시험 대기실에서도 모르게 입술을 씹는다. 입술을 뜯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입술 경계선에 껍질이 생기고 살결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진물이 났다.
‘에이, 이 정도야 뭐…’ 싶었는데, 남편 따라간 김에 피부과에서 진료받고 “심각한 정도의” 구순염 진단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레이저 치료받고, 스테로이드 연고를 받아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각종 립밤 테스트에 돌입했다.
올리브영에서는 바셀린, 트리헛, 약국에서 큐립, 병원에서 준 스테로이드 연고, 쿠팡서 구매한 프로캄, 빨간 상자 립밤까지 다양하게도 발랐다. 그도 그럴 것이, 스테로이드는 뭐든 단기 치료제라는, 간호사 시절부터 머릿속에 박혀온 알량한 지식이 떠올라 스테로이드 연고를 계속 바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자가 테스트 결과 나의 구순염 치료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 건 프로캄과 빨간 상자였다. 큐립은 여전히 껍질이 생기고, 프로캄은 촉촉하게 껍질 안 생기고 잘 발리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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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대를 거쳐 지금까지 통역사로 일하면서 수많은 단어와 표현을 외웠지만, 동시에 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를 읽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통역사가 된다는 건, 결국 ‘내 귀, 목, 입술을 소모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 셈이다.
오늘도 자연스럽게 용각산을 입에 털어 넣고, 립밤 한 번 바르고, 헤드셋을 노트북과 연결하면서 듣고 말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쩌면 또 하나쯤 컬렉션이 늘어날 수도 있겠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