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이 나에게 더 맞는가 고민한다면
통역사는 기업 내에서 다소 특수한 위치에 있다. 특수 직군이다 보니 어떤 기업은 통역사가 전체 사내를 통틀어 한두 명인 곳도 있고 어떤 곳은 몇십 명 이상이기도 하다. 통역사가 많은 곳과 적은 곳 모두에서 근무해 본 경험을 기반으로 그 두 유형의 장단점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여기서 통역사가 많은 곳이란, 한 기업 내 인하우스 통역사가 최소 몇 십 명 단위인 곳이며 적은 곳이란 10명 이내로 있는 곳이라고 가정하겠다.
1. 업무강도
통역사가 많은 곳은 당연히 수요도 많아서 통번역 업무 강도가 더 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그만큼 내가 없어도 대체 근무자가 많기 때문에 장점이 될 수 있다. 연차 사용도 자유롭다. 반면 소수의 통역사가 근무하는 경우 나를 대체할 사람이 없을 수 있어 오히려 강도가 높을 수 있다. 연차도 회사 일정에 맞춰야 할 때도 왕왕 생긴다.
2. 고립도/친밀도
통역사가 소수인 곳은 아무래도 직무의 고립도가 높다. 우선 일반 직원들부터 통역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내가 속한 팀 내에서 나의 업무가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팀원과 공감대가 적다. 보통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끼리는 최소한 대화 주제가 겹치기 마련인데 그들과의 업무 내용이 겹칠 일은 없으니 여기서 오는 고립감이 발생할 수 있다.
반면 통역사가 상당히 많은 곳에서는 공감대 형성이 잘 이루어지며 대화 주제도 겹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을 수 있다.
3. 사내 목소리
통역사가 소수인 곳은 어떤 건의사항이 있을 때 이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주변 상황에 더 좌우되는 것 같다. 임원 담당일 경우 해당 임원에게 뭔가를 건의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그보다 힘센 사람이 아래로는 당연히 없을 테니 어디 가서 고충을 말하기가 애매할 때가 많다. 고충을 말하고자 해도 배경부터 설명이 만만치 않다. 반면 통역사가 많은 곳은 우선 통역팀 헤드가 직급이 높을 테고 모두가 불편해하는 상황이 있을 경우 이들을 어느 정도 대변해 줄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단체에 속해 있을 때 소속감이 채워지는 것처럼...
4. 업무 체계
통역사가 적은 곳이 꼭 업무체계가 부족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수인계만 잘 된다면 전임자가 하던 데로 하는 것이 곧 체계라고 할 수 있지만, 퇴사와 이직이 잦은 이 직군에서 지금까지는 인수인계를 잘해주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내가 곧 룰이다”처럼 체계를 직접 만들어나갈 여지가 있기도 하다. 나 혼자 있으니 내 역량은 나만 알고 그래서 기한도 내 가용성에 따라 정해지기도 했다.
그에 반해 통역사가 다수인 곳에서는 체계는 비교적 잘 세워져 있다. 하지만 그만큼 더 기한이나 형식이 엄격하게 준수된다. 요청되는 통번역 총량도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통번역을 신청하는 절차가 여러 단계를 거쳐 정립되어 있다. 이 정해진 절차에 의해서만 통번역이 요청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확실히 애드혹 요청 같이 예측하지 못한 불확실성을 줄여주긴 한다.
5. 업무 평가
통역사가 적은 곳의 경우 평가 비교군이 적기 때문에 통역사끼리 경쟁이 어쩌면 약할 수 있다. 서로 간 업무 차이가 크지 않고 또 통역사가 1인일 경우 비교대상이 아예 없기 때문에 오히려 최하 평가 등급은 면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반면 통역사가 다수인 곳은 서로 업무 내용이 큰 틀에서 비슷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외의 업무에서 변별력을 가르게 될 수 있다. 즉 본업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통해 두각을 드러내야 허는 것이다. 통번역 업무라는 것이 프로젝트 통번역을 제외하면 사실 주어진 단건의 업무를 완수해 나가는 일의 연속이라고 생각해 볼 때 그 외의 업무를 스스로 발굴하고 이를 어필해야 하는 것이 다소 쉽지는 않을 수 있다.
통역사가 많은 곳이든 적은 곳이든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해나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업무 환경이 어찌 됐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에 통역사가 나 혼자인 것은 그에 수반되는 외로움을 견디는 것도 업무 환경을 헤쳐 나가는 것에 포함되는 것 같다. 이런 부분을 미루어볼 때 개인적으로는 통번역사가 많은 곳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곳이 여초 집단이기도 하기에 이를 오히려 기피하는 사람도 있다.
좀 더 독립성을 보장받고 싶고 나의 일의 베타성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통역사가 적은 곳에, 다수에 묻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단체의 목소리에 기대고 싶고 또한 체계가 좀 더 확실한 곳에서 조용히 성과를 내고 싶은 사람은 통역사가 많은 기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