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시간에 영화를 보면서 나는 철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상과학 영화들은 기술의 진보와 인간의 삶과 철학을 적절하게 섞어서 반죽해 놓았다. 무엇보다 '시간'에 대하여 어떤 관념을 깨지만, 상실에 대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지루하도록(그러니까, 계몽적으로) 열거한다
이 문구들은 문구로 쓰였다는 것 자체로 마음을 끌게 된다. 인간의 지각은 여기에 반응하도록 설계된 것일까? 아마도 어떤 진보를 이끌어 낸 이들은 무척이나 고독했을 것이다. 망망대해에 홀로 있는 느낌이었을 테니까. 반면에 어떤 경이로움도 있었을 것이다. 엔터프라이즈 호를 타는 승무원들은 모두 새 가족이다. 그들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탐험의 길을 떠난다. 기존의 모든 기억은 압축파일로 과거에 두고
그런데 미지의 세계는 그 과거와 계속 만난다. 아직 가 보지 않은 행성만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그 자신의 기억도 미지의 영역인 것이다. 두 개의 미지가 운명처럼 만나는 지점에서 사건은 드러난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우주의 깊은 심연은 시간과 거리 그리고 속도를 뛰어넘는다. 엔터프라이즈 호는 그 심연을 항해하면서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미래를 어느 순간 현재가 되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과거와 미래가 현재가 되더라도 그 자신의 토대가 되는 기준을 벗어날 수는 없다. 몸과 기억이 바로 그 자신의 토대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대사와 빌런 대사의 차이는
바로 이거다
주인공 대사가 용기와 꿈과 탐험이라면
빌런 대사는 운명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다
대체로 어떤 경우에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빌런이 명대사들을 하는 경우가 더 많더라는....
그 이유는 끝을 알 수 없는 집념의 복수와 그 기억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비극'인 것이고, 그 이면을 가리키고 있기에 '시적'이다. 운명은 시적이다. 고대 그리스인이 비극을 노래했던 이유 역시 이 운명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빌런이 어떤 역할로서 그 힘을 담당하고 몰락하지 않는다면, 주인공의 몰락과 비상도 일어날 수 없다. 이 대립은 기술적 진보와 철학을 단번에 시간 너머로 도약시킨다. 자유다. 받아들임이다. 고통에서의 해방이다. 세계의 재구성이다
주) " 모두 알다시피 미지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잠시 숨겨져 있을 뿐!"
빌) "하지만 난 감사하고 있다. 평생 이걸 찾아 헤맸는데, 너희가 찾아서 내게 가져왔어. 운명이란 참 시적이지..."
등장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이 대사들은 니체가 말한 바로 투키디데스의 인물 묘사 방식에 가까울 것이다. 인물의 성격을 정밀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그 사람의 말하는 방식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각색되어 표현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그 인물의 개성을 말에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미지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잠시 숨겨져 있을 뿐" 이 철학적인 표현을 주인공이 말했을 때, 거기에는 어떤 앎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모든 미지는 아직 탐험되지 않았을 뿐, 그것이 비밀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 이걸 찾아 헤맸는데.., 운명이란 참 시적이지" 모든 것을 걸었기에 비장한 그 순간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으면(반면 관객은 믿지 않는다), 운명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고통을 받아들임' 없이는 피해 갈 수 없다
어차피 운명은 두 갈래 길로 펼쳐진다. 그래서 시적이다. 실재와 은폐를 동시에 보는 관점이니까. 과거와 미래에서, 지금 주어진 시간의 넘나듦에서 그 자신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망가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길은 외길일 수밖에 없다. 빌런이 말했기에 비극은 완성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안전한 거리에서 그 비극을 본다. 그리고 어떤 텅 빈 슬픔을 느낀다. 사람들의 파괴적 욕망은 그때 진정된다. 주인공은 그때 커진다. 더 은폐된 미지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