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규정하는 일 - 패러다임의 전환적 대사건
문득, 때로는 어떤 생각을 한다. ‘나’ 가 ‘너’ 에게 고통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나" 가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끝까지 갈 수 있는 이유는 나에게 고통을 준 것에 의해서이지 않을까. 바로 가장 아픈 것을 직시하고 그것을 끝내는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고통은 '사랑'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초극'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돌고 돌아서 '내 집 마당에 핀 매화'를 본 그 느낌처럼, 영혼이 표백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敵'이라고 규정되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 적을 바로 즉각 '고통'으로 치환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적'이지 고통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고통은 그 자신에게서 잘라내야 할 '종기'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다 썩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사과나 귤이 한 개만 썩어도 전부 번지듯이. 하지만 ‘적’은 끝가지 나와 함께 가는 것이다. 내 안에서 같이 곪은 후 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통’의 본 뜻일 것이다.
고통은 내가 무엇인가를 마음에 담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의 회전에서 그 자신이 무엇을 극기하고 극복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견디는 것, 그것은 '고통'이다.
자기 자신을 연마시키는 것을 다시 만났을 때, 하나의 충동이 되고자 하는 그 열망! 그것이 모든 인간의 열망 아니겠는가!
사람이 생각을 라이브 방송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어디에서도 당신에게 이런 것을 들려줄 사람은 없다.
기분이 몹시 불쾌하였다면 당신은 바로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
바로 그 부분을 당신은 파헤치고 들어가야 한다.
어쩌면 '격세유전'적인 그런 것들만이 우리를 추인했어야만 하고 어떤 변화를 가능하도록 추동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참으로 지난한 시간의 기억을 우리는 깊이 껴안고 그리고 다시 꼭 껴안고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의 중첩 그 자체가 주는 고통이 있다. 이것은 시간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은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시간은 그 자체로 어떤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 상실을 한 잎 한 잎 떨구고 다시 텅 빔에서 피어난 것들에 의해 가볍게 비상해야 하는 시간을 만들어 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있어 낯설지 않다고 과연 말할 수 있겠는가. 서로의 그 안에 그렇게 켜켜이 쌓인 시간을 우리는 아직 모르는 데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잘도 '아는 척' 한다.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움벨트 Umwelt'적인 상황에 해당될 것이다. 그 각각이 가진 세계는 닫힌 세계이고 그 세계는 쉽사리 들어갈 수도 볼 수도 없는 세계이다. 다만 그 자신의 초극에 의해 바깥과 연결될 수 있을 뿐이다. 자기 세계이다. 자기만이 인식하는 세계.
그러므로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경각심과 적정 거리에서 '예의'를 차리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시간인 것이다.
새롭게 신선하게 만나기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지금'이었기에 가능했던 거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만남'에는 누구나 다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 중요하게 여기며, 서로 접근하며 만나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그러고 싶은가?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 아닐까.
어떤 그 자신들의 에너지가 만나서 꿈틀거리며 연결되며 용솟음치는 경험들만이 그 자신의 어떤 미래를 연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패러다임적 전환이기에 그러하다.
이 전환이 삶을 만든다.
이 일련의 과정은 엄청난 '대사건 événement'과 같은 것. 이것을 '사건적 시각(발생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우리가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해 갈 수 있는 것. 그 안에 각자의 생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는, 이렇게 대략적인 역사 형태에서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 거시적인 세계와 미시세계의 충돌은 '사건'적이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에서 볼 때는 '검사 되는 물체는 거시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센티미터 단위로 잴 수 있는 정도의 크기여야 한다고'. 이렇게 볼 때 역사와 개인에서 보자면 개인은 미시적인 세계이지만, 거시 세계를 측정하는 단위에서 다시 본다면, 개인 역시 하나의 거시 세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 안에서도 거시와 미시는 공존한다. 우리는 거시적인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미시적인 세계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단위로 잴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늘 어느 순간 드러난다.
하나의 일이 완성되기까지는 처음에는 더디고 긴 시간이 걸리지만, 점차로 그 시간의 간격이 단축된다는 것. 자연사도 인류사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쳤다는 것. 앞으로는 더 동시대적인 상황이 순간적으로 진행될지도. 그럼에도 어떤 것들은 일정 궤도에 오르면, 그 속도를 유지하듯이, 일정한 그 시간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안정화 상태일 것이다. 아마도!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의 혁명을 말하였다. 이 상태에 도달하면 무너지지 않는 패러다임 상태가 되는가. 아니면 그때가 또 다른 혁명의 상태인 도약으로의 새로운 패러다임 상태로 전환의 시점인가는 불분명하다. 다만 모든 다수가 혁명을 원할 때는 오히려 뒤집을 만큼 '두꺼운 판'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시스템에 충실한 채로 판을 키우는 사람들의 형태가 혁명의 싹을 키우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어느 시작의 시발점을 상기하며 자기와의 상관관계를 알아차리는 일들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격세 유전적 사고가 아니겠는가. 정신의 유전이란 바로 인간이 적을 자기 안에서 함께 가두어 같이 곪아서 죽은 후, 다시 그 무엇으로 드러나는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