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단론과 한계인식과 척도
에피쿠로스파가 말하는 것, 즉 감각이 보여 주는 모습이 거짓이라면 우리에겐 지식도 없다는 것, 그리고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것처럼 감각이 보여 주는 모습들은 너무도 거짓되어 우리에게 어떤 지식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독단론의 양대 학파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지식이란 없다고 결론지어야 하리라.
- <에세 2>12장에서 발췌 -
몽테뉴는 에피쿠로스파도 스토아학파도 모두 독단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기존 학파들의 주장은 무더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한 무더기의 사상은 모두 나름대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한계에 의해 독단론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어쩌면 그 한계는 어떤 경계일 것이다. 예컨대 그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느 선이 있는 것이다. 그 선을 넘으면 경계가 드러난다. 그때 한 무더기는 그 자신을 억압하는 어떤 굴레처럼, 독단론으로 그 자신에게 인지되는 것이리라. 그 자신 바깥에 있는 하나의 개별적 대상일 뿐이므로 타자화되는 것이리라.
몽테뉴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를 독단론으로 보았고, 니체는 '신약'을 독단론으로 보았다. 니체는 몽테뉴의 사유 방식과 시적 문체, 자유로운 정서에 교감하면서도 결정적인 사유의 방향에 있어서는 서로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또 면밀하게 살피면, 몽테뉴는 구교에 더 치중하는 종교 형태를 갖고 있었으니, 니체와 또 크게 부딪히는 것은 아니다. 몽테뉴 생전 당시는 프랑스에서 '위그노 30년 전쟁 시대'였고, 그 한복판을 관통하며 살았던 몽테뉴였으니, 몽테뉴가 자신의 종교관을 밝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반면에 몽테뉴는 30년 내란 상태에서도 전쟁에 참여한 양쪽 군인들이 번갈아가며 자기 성에 정박할 때, 그들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에세>에서 고백하고 있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신약에 가깝고 교회의 사제들의 매개자적 권력을 비판한 것이라고 본다. 거기에 신은 없다고 니체는 판단한 것이리라. 니체는 그 텅 빈 곳에 자유주의 사상으로 채웠다. 자유주의 사상이란 무엇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가 말하는 자유주의 사상은 고대 그리스적인 것이다. 호메로스 이전의 문화의 충동과 호메로스 이후의 문화적 충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럽사에서 자유주의 전통은 고대그리스 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몽테뉴가 독단론으로 말하고 있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 그리고 그 이전의 그리스 '비극tragedy 悲劇'의 정신이 자유주의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갈래의 길이 있다. 고대 로마에서 승인된 기독교는 라틴어를 성경의 언어로 삼았다. 라틴어는 중세에서도 지배 언어가 되었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로망스어군의 유랍의 각 나라의 언어들은 피재배 계급의 언어가 되었다. 이 두 언어가 중세에서 신학과 철학의 관계처럼, 주종 관계의 언어가 되었다. 르네상스부터 로망스어군의 언어들은 시와 문학을 다루는 글로 사용되었다. 당연히 이 뿌리는 고대 로마의 라틴어라고 보겠지만, 내 생각엔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고 보인다. 시와 노래와 서사를 다루는 이 로망스어군의 언어는 오래전부터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의 언어에 이 정서를 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맨스어군의 언어는 그리스 비극의 정서에 로마어가 결합된 형태로 보아야 한다. 순수한 라틴어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정서가 가미된 로망스어군의 언어가 각 나라의 민중의 언어로 자리 잡았던 것이라고 보인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로망스어군 언어가 활발하게 발달하게 된 것이리라.
몽테뉴는 로망스어군Romance languages에 속한 언어인 프랑스어로 <에세>를 썼다. 니체는 그 자신의 감흥을 극대화시키고 분출시킬 수 있는 언어 개발에 매진한 결과 그 자신들의 저작을 시적 언어로 계발하였다. 이를테면 몽테뉴가 프랑스어로 자연적인 발로의 인간 내면을 시적 언어로 서술하여 <에세>를 썼듯이, 니체는 독일어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자기만의 시적 언어를 계발하여 자기 생각을 글로 쓴 것이다. 언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글을 쓰는 이들이 할 일인 것이다.
독단론으로 비친 사상들의 주체들은 정작 그들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만큼 최상의 가치는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바깥에서 그러한 풍경을 보면 요지경처럼 우스운 풍경으로 비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직접적으로 겪는 사람들의 관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깥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전달받는 감정은 다른 것이니까. 안에서는 서로서로에게 힘이 전달된다. 즉 관계적인 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멀리서 조망하는 것이 훨씬 더 주관적일 수도 있다. 더 잘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안에서 일어난 얽힘까지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피상적 진단만 가능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구상에서 종교는 진즉에 소멸하였을 것이다.
독단론은 거의 모든 학파 외에도 거의 모든 종교에도 해당되리라.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유를 더 갈망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과 어디에든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홀로 있어야 더 세상이 잘 보이는 사람들과 여럿이 함께 하는 공동체에서 홀로보다 더 안정감을 찾는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 그건 그냥 존재방식의 차이이지, 더 우월하거나 더 수승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이 두 방식이 병행될 때 인간의 삶은 건강한 것이니까.
에피쿠로스파나와 스토아학파 역시 이 두 학파를 조리 있게 잘 혼합하면 나름대로 균형 있는 관점이 도출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어떻게 조율하며 자기 관점을 설정해 가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말로 하는 것보다 글은 지면상으로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를 만나서 이야기해 보지 않은 이상, 그와 같이 생활해 보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의 생각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람이 좋은 것인지, 그의 사상이 좋은 것인지는 구분해야 한다. 또는 추구하는 생활방식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공동체에 속한 것이 좋아서인지 역시 구분해야 한다. 이러한 레이어들이 한 사상에는 중첩되어 있다. 글은 그러한 중첩을 다 걷어내고 글만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독단론 아닌 것은 없다. 그 자신과 만나면 서로 경계 짓기 때문이다.
단지 그 상相들 중에서 사람은 자기가 취할 것만 취한다. 글을 부분 발췌하듯이, 아포리즘만 추려 내듯이, 사람은 어차피 골라서 자기에게 맞게 다시 조리한다. 후대인들은 항상 그 작업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어떤 사상이나 글을 남겼다는 것에서 후대는 비빌 언덕을 갖게 된다. 즉 생각의 피드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있기에 인간은 감각할 수 있고 지각하여 범주화하며 상을 불러와 상상하게 된다. 고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나온 것들은 인간에게 대상의 역할을 해준다. 그리고 거기서 진일보하거나 또는 퇴보하거나를 반복한다. 뒤뚱거리며 앞서 나온 것을 '대상(척도)' 삼아서 걸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