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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비과학적인 시와 실존적인 산문

일상의 편린들을 글에 담는 방법들

by 아란도







감각 작용의 오류와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각자 자기 마음껏 예를 찾아낼 수 있다. 그만큼 감각이 우리에게 주는 과오와 기만은 흔한 것이다. 골짜기에서 메아리치면 뒤에서 부는 나팔 소리가 우리 앞쪽에서 나는 것 같다.
- <에세 2> 12장에서 발췌 -




바다 위로 솟아 있는 먼 산들은
실은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 덩어리로 보인다.
배를 타고 연안을 따라가노라면
구릉과 들판이 우리 배의 고물 쪽으로 달아나는 것 같다.
질주하던 말이 강 한복판에서 정지하면
강이 마치 어떤 힘에 의해 역류하는 것 같다.
_루크레티우스_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몽테뉴가 인용한 이유는, 감각의 오류와 불확실성의 예시로서 이다. 우리가 풍경을 관찰할 때의 그 시각적 풍경을 그대로 루크레티우스는 산문시로 남겼다. 문학적으로는 어떤 감상에 젖어들게 만들어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메커니즘적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과학적이거나 자연적 진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사실은 허상이라는 것을 몽테뉴는 말하고 있다. 현실을 사는 존재가 비현실의 풍경을 보고선 그 기준으로 현실을 산다면 얼마나 오류 투성이가 될 것인가! 하는 것마다 낭패를 볼 것이다. 몽테뉴의 시적 산문의 문체는 유려하게 흐른다. 이 한적한 아름다움 안에 그는 실존적인 면모를 담아 놓기도 하였다. 리얼리티가 몽테뉴에게는 더 직접적으로 감각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가 주는 감성을 우리가 외면하면 우리는 너무도 삭막해질 것이다. 시는 본래 비과학적이다. 인간의 마음도 매 순간 이랬다 저랬다 한다. 그런데 감각이 포착한 그 풍경은 그때에 그 자신에게 그렇게 인상을 만든다. 인상은 누구나 조금씩 다르게 느낀다. 주관적 소산물로서의 감성은 그 자신의 유일무이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어떤 것을 포착하는 것에 있어서 그 자신만의 느낌으로 해석한 것을 건져 올리는 것 역시 삶에서는 중요한 작업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좀 더 나아가 양자적 관점으로 본다면 어떠할까? 서로 미는 힘은 루크레티우스 시처럼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척력의 관계에서 보자면 말이다. 이럴 때는 시가 오히려 더 메커니즘적이기도 하다. 양쪽의 관계를 드러내었으니까 말이다. 파동처럼 존재하는 순간을 그린 것일 수도 있으니까. 어느 순간 세상은 출렁이며 휘어지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또 다른 어떤 세계를 보기도 한다. 그건 보이는 사람만 그것을 붙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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