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상적인 것의 깊이
단호한 결심으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자청해서 당하는 일격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리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건강을 위해 상처를 째고 지져 달라는 사람들이 외과 의사의 준비, 도구 그리고 시술을 차마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본다고 해서 고통이 더해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이성보다 우세한 감각의 권위를 증명하기에 적합한 예들이 아닌가.
- <에세 2> 12장에서 발췌 -
절벽 끝까지는 내 키만큼의 거리가 있고 일부러 위험을 향해 몸을 던지지 않는 한 떨어질 수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또 거기서 알게 되었다. 높이가 아무리 높아도 그 비탈의 시선을 좀 거들어 분산시킬 만한 나무나 튀어나온 바위가 있으면, 그것들이 마치 우리가 떨어질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편해지고 안심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절벽이 깎아지른 듯 매끈하면 머리가 빙빙 돌지 않고서는 내려다볼 수조차 없다.
이것은 시각의 명백한 사기詐欺이다. 저 뛰어난 철학자(데모크리토스)는 시각이 야기하는 분심分心을 풀어주려고, 그리하여 더 자유롭게 철학하기 위해 자기 두 눈을 뽑아버렸다. 하지만 그럴 양이면, 테오프라스토스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변하게 만들 수 있을 만한 강력한 인상을 받아들이는 가장 위험한 기관이라고 한 귀도 막았어야 할 것이요, 결국 다른 모든 감각을, 다시 말해 존재와 생명 자체를 없애버렸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가 우리의 이성과 영혼을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모습, 어떤 엄숙한 목소리,
어떤 노래가 정신을 깊이 흔들어 놓는 일은 흔히 일어나기까지 한다.
어떤 근심, 어떤 공포도 자주 같은 효과를 낳는다"
_키케로_
의사들은 어떤 음성이나 악기 소리에 미칠 정도로 정신이 산란해지는 체질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식당 밑에서 뼈를 물어뜯는 소리를 참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줄로 쇠를 쓸 때 나는 그 새되고 날카로운 소리에 괴로워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가 바로 곁에서 우적우적 씹는 소리를 내거나, 목이나 코가 막힌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고 증오가 솟구칠 정도로 신경이 예민해진다.
감각이 우리 오성에 끼치는 이 속임수, 그것을 이번엔 감각들이 당한다. 우리의 영혼도 때로 똑같이 복수하는 것이다. 영혼과 감각은 다투어 속이고 속아 넘어간다.
우리가 격분해서 보고 듣는 것은 사실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다.
- <에세 2> 12장에서 발췌 -
영화 보기, 소설 읽기도 마찬가지이다. 눈으로 보는 것, 눈으로 읽는 것은 그 시각적 효과와 더불어 공포를 배가 시킨다. 그때 다른 감각도 동시에 작동하며 상상하기 때문이다. 공포 영화나 공포가 스며드는 소설은 먼저 촉각을 자극한다.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경험하며, 때로는 찔리는 것처럼, 베이는 것처럼, 또는 형상이 머릿속에 각인되기도 한다. 괴물이나 귀신, 호러물의 형상은 그런 공포를 배가시킨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실제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공감각적 공포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그런데 또 인간을 그렇게 극한의 감정으로 몰고 가는 영화나 소설이 대박을 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작품들 역시 그러하다. 삶이 주는 고통이나 사회가 주는 압박들, 국가 폭력 또는 가족 폭력, 개인과 개인의 폭력에서 오는 공포는 그저 영상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우리에게 공포감을 준다. 그리고 어떤 불안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소설 읽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런데 어떤 이미지와 잔상이 남아 내내 마음을 끌거나 고민하게 만들거나 삶을 다시 둘러보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그저 눈으로 보았을 뿐인데 일어나는 우리 신체와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이것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그 자신이 몸으로 느낀 그때의 신체 반응은 진실이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의 내용은 허구다. 가짜를 보고 몸이 반응했다고 몸을 탓할 것인가? 거짓을 보고 정신이 골몰하게 되었다고 정신을 비난할 것인가? 우리는 대상을 보면 바로 어떤 감정을 느낀다. 좋고 싫고 무섭고 화나고 등등의 어떤 상황에 빠진다.
이때 오감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그러한 반작용이 신체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진실과 거짓으로만 판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눈으로 본 그것에서, 귀로 들은 그것에서, 만져 본 그것에서, 맛본 그것에서, 냄새를 맡은 그것에서 모든 감각이 거의 동시에 반응하는 것이다. 즉 신체가 반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본 그것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자신이 대담한 성격이라고 해서, 그러한 신체 반응에 둔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신체 반응의 기준까지 적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감각은 이처럼 개별적인 것이다. 한 신체를 소유한 그 자신만이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에 대한 공포는 또 어떠한가? 하지만 사람은 점차로 인식하고 지식이 늘어감으로써 어둠의 공포를 극복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 공포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지성에 의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성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빠지면, 소리를 지른다. 깜짝 놀라는 것이다. 그때 몸에는 소름이 돋아날 것이며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다. 그러니 감각적 반응을 우리가 도외시할 것은 못 된다.
칼로 조금만 손을 베여도 우리는 아픔을 느낀다. 감각은 신체 반응과 심리 반응 모두에 작용한다. 이 두 반응에 의해 우리는 어떤 지각을 갖는다. 즉 대상을 재인지하는 것이다. 그때 어떤 한계가 함께 한다. 그 대상과의 한계점에 다다를 때 우리는 그 대상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식은 경험으로 축적되며,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 우리가 사물을 알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 어떤 상태를 인식한다는 것, 문득 그 자신의 마음이 그 자신에게 인식될 때가 있다. 그 자신이 어떤 심리 상태에 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자각하게 된다. 그럴 때 그 마음 상태는 비물질이며 느낌으로만 감촉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실제의 물질처럼, 사물화 되든 듯이 만져지는 촉감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럼 그때 그것은 물질이었을까? 비물질이었을까? 우리가 막 잡은 돼지의 간이나 염통을 물로 깨끗이 씻었을 때 드러나는 선홍색 빛의 물체, 바로 그러한 약간은 물컹거리듯 하지만 표피는 손상되지 않은 그런 것이 만져지는 것 같은 느낌, 그 주변은 흐릿하여 안 보이고 그것만 부각되어(약간은 안개에 서린듯한) 살아 있는 느낌, 그 감촉의 느낌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상태다. 그때 단지 그 하나의 형상과 감촉에 의해 그것이 감정이라는 것만 생생하게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입자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정신 안의 상상 작용이 만든 환각이었을까? 우리의 정신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저 깊은 곳까지 때로는 우리를 안내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피상적인 것을 제대로 보면 그것이 다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을 제대로 보면 깊이를 보는 것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