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4. 사건의 주인은 누구일까

해석한다는 것에 대해서, 의미화되는 과정

by 아란도







결국 누가 이 차이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다양한 주장 모두를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서 아무 선입견 없이 판단하려면 이 모든 성질이 하나도 없는 누군가여야 하리라. 이런 점에서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는 판관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감각은 그것 자체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의 논쟁을 끝낼 수 없으니 판단력이 나서야 한다. 하지만 어떤 판단도 다른 판단 없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무한정 뒷걸음질 쳐야 한다.

우리의 사고는 우리와 무관한 사물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중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은 무관한 대상 자체를 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가 대상에서 대상에게서 받은 인상들만을 품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생각이나 사물의 모습은 대상의 것이 아니고, 오직 그 사물이 감각에 남긴 인상일 뿐이다. 이 인상과 대상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모습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은 대상과는 다른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의 인상들이 유사성에 의해 외부 대상의 자질을 영혼에 전달한다지만, 영혼과 오성은 그 외부 대상과의 직접적인 교섭이 전무한데 어떻게 그 유사성을 확신할 수 있을까?

보이는 면모로 사물을 판단해 보겠다고 한다면, 사물들이 보여주는 면모 전부를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경험으로 알다시피, 그 면모들이 모순과 불일치로 서로 훼방을 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일은 결코 완결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에도, 사물들의 존재에도, 항존 하는 실체實體란 없다.

이렇게 판단하는 자와 판단받는 것이 끊임없는 변화와 움직임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와 다른 것 사이에 확실한 무엇이 수립될 수 없는 것이다.
- <에세 2> 12중에서 부분 발췌 -











사물을 보고 뭔갈 행위하면, 시를 쓰거나, 글을 쓰고 말을 하면, 그것은 자기 인상에 의해서이다. 그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가(이것은 시각만이 아니라 육감의 작용이다)는 자기의 느낌을 의미한다.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 풍경은 그 자신에게 어떤 인상을 만든다. 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기분이 분명 안 좋은데 예쁜 풍경을 보면 기분이 풀어진다. 왜 그럴까? 이는 어떤 결여가 충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결여일까? 시각은 본능적으로 ‘미적인 것’에 반응한다. 그 원인은 인간의 감각기능이 그렇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비적 속성이다. 미와 추의 대비가 확연할 때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고통의 상태에서 기쁨은 더 큰 기쁨으로 증폭된다. 거기서 인간은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은 환희감을 준다. 그 무한한 순간의 희열에 의해 인간은 미를 느끼는 것이다. 밸런스가 깨진 상태에서 다시 밸런스의 복원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인간의 내적 자기 구원 또는 치유로서의 평정은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에도 어떤 모순은 있다.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면 화를 내게 된다. 이것은 감성(몽테뉴는 영혼이라 표현했다)의 강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감성의 폭압에 못 이겨 사냥을 떠나야 한다(그 감정에 대한 고통의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운명이 되기도 한다).


이것을 정신작용의 메커니즘에 대입하면, 감성의 폭압은 인지작용의 푹 발 할 때 일어난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해 아직 인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것을 인지하면, 그때의 어떤 충격이나 놀람은 스트레스를 동반한다고 보인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화를 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이때 그 자신에게 인지가 된 것을 감성은 감정, 기억, 상상 단계에서 감성이 작용하여 그것에 대한 해석을 요구한다. 이때 지성이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신은 괴롭다. 감성의 폭력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어떤 것에 이끌리거나 또는 어떤 자기 고뇌 상태에 빠지는 이유는 감성이 그것을 해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감성은 해석된 것에 의해 의미화되면 그것을 범주화시며 전체로 연동시킨다. 그렇게 감성은 편안해진다.


"결국 누가 이 차이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관계의 메커니즘이 해결한다. 가장 고통받는 이(무엇)가 해결한다. 정신에서는 지성이 그 역할을 떠맡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성에게 매일 밥을 주는 것이다. 잘 처리하시라는 의미에서! 하지만 그것의 최종 승인은 감성이다. 감성이 가슴 안에서 뻐근하도록 환희감을 느껴야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모든 설계자는 감성이기도 한 듯, 여기저기 다 관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나의 그 무엇이 해석되려면 그 자신 안에서 인지된 그것에 갈증을 느끼는 감성이 예민해야 한다. 그 감성의 권력행사가 곧 이 시건의 주인인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