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받아들여 극복하는 의미로서의 신,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
플라톤은 물체들이 결코 실존을 가져본 일이 없고, 다만 출생할 뿐이라고 말했다.
퓌타고라스는 모든 질료가 흐르고 흩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스토아파는 현재라는 시간은 없다고,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은 미래와 과거가 만나는 연결점에 불과하다고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동일한 강물에 두 번 들어가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에피카르모스는 전에 돈을 빌린 사람은 지금 그 빚을 지고 있지 않고, 전날 밤 아침을 먹으러 오라고 초대받은 사람은 이젠 초대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죽게끔 되어 있는 실체는 두 번 다시 동일한 상태에 있을 수 없는데, 빠르고도 가벼운 변화에 의해 어떤 때는 흩어지고 어떤 때는 모이기 때문에 왔다가는 곧 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태어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존재의 완전성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렇다고 태어나는 것을 완수하지도, 멈추지도 않으면서 그런 상태로 끝에 이른다. 그렇게 종자 때부터 항상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하고 탈바꿈하며 간다.
실로 시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어느 것에서든, 한 상태에 필히 다른 상태가 이어진다.
저 자신과 닮은 채로 존속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바꾸니,
자연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변하도록 강요한다.
_루크레티우스_
우리만이 어리석게도 한 종류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늘 그대로 머물러, 항상 여일如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화를 겪는 것은 계속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고, 동일하게 있지 않으면 있음일 수 없다. '있는 것' 전체가 변함과 동시에 '있음'도 변하여 항시 다른 것이 되어 간다.
감각은 자연이 속고 속이게 되어 있다. '있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영원히 있는 것, 다시 말해 출생할 일도 없고 결코 끝도 없는 것, 시간이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는 것. 왜냐하면 시간이란 움직이는 사물이기에, 결코 안정되어 영속적으로 머무는 법 없이, 항상 흐르고 유동하는 질료와 더불어, 마치 그 그림자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시간에는 '전'과 '후', '있었던' '있을' 등, 즉각 그것이 있지ĕtre 않은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단어들이 따라붙는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이미 존재하기를 그친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고 명백한 거짓일 테니까. 그리고 '현재', '순간', '지금' 같은 단어들로 말하자면, 주로 그 낱말들 덕분에 우리가 시간에 대한 인식을 세우고 지탱하는 것 같다. 이성은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당장 부숴버리기 때문이다. 이성은 즉시 시간을 쪼개어 미래와 과거로 나눈다. 필히 그것을 둘로 나눠 놓고 봐야겠다는 듯이 말이다.
자연을 측정하는 시간에 일어난 일이 측정되는 자연에게도 일어난다. 자연에도 머무르는 것, 지속하는 것이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자연에서도 모든 것이 태어났거나, 태어나는 중이거나, 죽어가는 중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시간의 척도를 따르지 않고, 부동무변하며, 시간으로 잴 수 없고, 어떤 쇠퇴에도 종속됨이 없는 영원성 안에 존재하신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 앞에도, 그 뒤에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더 새로운 또는 더 최근이란 것도 없을 것이되, 오직 하나인 '지금'으로 '항상'을 채우는 단 한 분, 참 존재자가 계실 뿐이다.
주먹보다 더 큰 것을 쥐려 하고, 아름이 넘는 것을 안으려 하며, 다리를 뻗칠 수 있는 만큼보다 크게 내디디려 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과 인간성 위로 자기를 올리는 것 역시 그와 같다. 그는 자기 눈으로밖에 볼 수 없고, 자기 손아귀로밖에 쥘 수 없으니까.
하느님이 놀라운 은총으로 손을 빌려 주신다면 그는 올라갈 것이다. 자기 고유의 수단을 버리고 포기함으로써, 순전히 하늘의 수단에 의해 높여지고 들어 올려지도록 자기를 맡김으로써 올라갈 것이다.
이 거룩하고 기적적인 변모를 향한 소망을 둘 곳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지 그(세네카)의 스토아적 덕성이 아니다.
- 위의 인용 글 전체 <에세 2> 12장에서 발췌 -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존재, 즉 ‘있음’이 아닌가? 이러한 있음이나 아트만(불멸 자아) 논설을 불교에서는 희론이라고 말한다. 희론은 장난처럼 실속 없는 말이자 진실을 왜곡하는 무의미한 논의라는 의미이다.
서양 철학에서 인간이 신적인 주체를 회복하는 것은, 영혼이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라는 관점이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영혼은 신에게만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어쨌든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 신에게만 있는 '신성'이 있다는 말은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몽테뉴의 말 역시 인간은 변화 속에 있는 유한한 존재이고(존재한다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동양의 주역 역시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고 하고 있고, 실제로 자연 안의 모든 것은 제 시간이 끝나면 사라진다. 그러한 자연의 법을 불교에서는 연기법이라 하였고, 인간은 무아적 존재이며, 자연은 항상 변화하기에 무상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자연도 인간도 모든 사물들도 시간적 존재이다. 정해진 타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아인 존재를 말하는 것은 곧 시간에 구애됨을 받지 않는 신을 자동적으로 대비시키게 된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희론적인 것에 긍정의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이 동시에 존재했고, 고대 불교는 희론을 부정하였다. 이것은 퓌론주의적인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퓌론주의적 입장은 그 학설이 불교에 비해 간결하게 보인다. 그래서 약간은 정수가 빠진듯한 느낌을 준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어떻게 보는가? 에 달렸다는 의미이다. 불교의 무상고무아에 비추면 모든 만물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런데도 이 우주는 계속 존속하고 있다(물론 언젠가는 소멸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이전과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이 요즘 양자물리학의 우주적 관점의 관심사라고 보인다. 과학은 계속 그 길을 탐색하고 있다. 어쩌면 무엇인가는 있어야만 성립되는 이 엄청난 모순을 해결하는 것으로써의 ‘신’이 아닐까 싶다. 그 텅 빈자리에 신을 두면 모든 이야기의 아귀가 맞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는 구조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신’으로 이해하고자 한다(이 내용은 다른 글에 써 놓았다).
다만 몽테뉴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신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몽테뉴 말처럼 누구라도 그 자신이 원하는 것에 끼워 맞춰내니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적인 어떤 것을 삶에서 모두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신은 지각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신적인 것을 지각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지각되는 그 느낌으로 우리는 신성을 경험한다.
자연의 무상함, 그 자연을 넘어서는 신. 몽테뉴의 자유는 신을 인정한 상태에서의 자유이므로, 아마도 지금 내가 쓰는 글과 부합하는 자유일 것이다. 니체의 자유는 ‘신은 죽었다’에서 오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텅 빈 공백이 생긴 것이다. 그 텅 빈 공간에서 오는 혼돈의 시간을 넘어가야 하는 것이며, 다음 인간을 기다려야 하는,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 것을 자처한 셈이다. 그 시대가 아마도 그에게는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