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비존재
우리는 존재와 아무런 교류가 없다.
<주석 272> 여기서부터 몽테뉴는 1572년에 아미오가 번역 출간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모음집>> 1권 48장을 글자 그대로 인용한다.
여기서 존재는 불어로 ĕtre, 영어로 be, being에 해당하는데, 이 동사는 사물의 있음, 존재 그 자체의 상태를 표시하는 동사이기도 하고, 사물의 속성을 표현하는 부가형용사를 매개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용법에서는 과거형 미래형도 쓰이므로 변화를 내포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항구적 속성을 지니고 늘 동일자로 머무는 상태로 극단화해 시간성을 지닌 만물의 유전하는 성질과 대립시킨다.
이런 존재 상태는 결국 영원무궁하고 변함없는 존재, 즉 신에게만 가능한 존재태로, 인간은 감히 그런 존재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성 전체가 항상 출생과 죽음 중간에 있고, 모호한 모습과 그림자, 불확실하고 허술한 의견만 내놓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겠다는 생각에 골몰한다면,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주먹으로 물을 쥐여 보겠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본성상 사방으로 흐르는 것을 세게 쥐면 쥘수록 그만큼 움켜쥐려는 것을 잃어버릴 테니까. 이처럼 모든 사물은 한 변화에서 다른 변화로 넘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진정한 실체를 찾으려 하는 이성은 항구적으로 존속하는 것을 잡아낼 수 없어 낙담하고 만다. 모든 것이 존재로 오고 있되 아직 완전히 존재하지 않거나 태어나기도 전에 죽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존재로 오고 있되 아직 완전히 존재하지 않거나 태어나기도 전에 죽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만큼 철학적 개념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을까? 나는 이 문장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나 생명에 대해 이처럼 표현할 문장이 또 있을까? 이 책을 읽는 후대의 철학자들은 아마도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빈 공간의 대평원처럼 펼쳐져 있다고 느꼈을 테니 말이다. 그 땅을 달려보고픈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문득, 사람이 무엇인가를 맡거나 일을 한다는 것은, 그때 그 사람만이 할 수 있어서 맡겨 놓은 것이다. 세상 일이 다 그렇다. 본래적으로 자기 것은 없다. 단지 인생에서는 일시적 소유 기간 사이클이 상대적으로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인간은 이 기간을 교육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에 대의민주주의를 적용하면, 민주주의에서 이 순환 기간은 인위적으로 정한 것이다. 민주주의 역시 자연의 진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옛날에는 신분 세습이나 또는 역성혁명으로 정권이나 국가가 교체되었다면, 현시대는 선거제도에 의해 교체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서는 정권이 바뀌어도 국명이 바뀌지는 않는다(물론 국민이 합의하면 국명을 교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 사는 일은 그저 대리인에 불과하다. 제도에 의한 것이든, 타고난 것이든 대리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사람을 거쳐서 어딘가로 또 거쳐간다. 계속 거쳐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을 붙잡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직을 직분에 맞게 제대로 했다면, 헌법에 저촉될 사건 없이 임기를 마치고 제대로 물러났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일단은 공과에 상관없이 일단은 훌륭한 태도라고 간주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선거제도로 선출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신분제나 역성혁명 같은 시대에 맞춰 생각을 하는 거 같다. 민주주의는 근대에서 출발한 제도이지만, 여러 시대를 함축해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두 뿌리
내 생각에 유럽 진보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 자유정신 같다. 니체의 모더니즘(그의 책에 모더니즘 기치가 쓰여 있다)을 발판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나왔다. 나는 이 계통이 서양 지성사의 뿌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니체를 포함해서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좋은 제도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의 한계(이상적)를 미리 비판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두 줄기, 자유주의(비극/시/정서/감성/귀족)를 반대하여 철학이 나왔다. 이 철학과 결탁한 게 기독교다(신학철학/성경/이성/성직자). 유럽 지성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에 닿아 있는 것 같다. 닻을 거기에 내리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가 형태 변이를 일으켰다고 보인다. 카이사르에게서 민중파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단지 황제로 둔갑을 했지만, 그 힘의 주체는 민중파에 있었으므로 현대 민주주의 시초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민주주의의 요소에 왕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부르주아와 정치가 결합한 것이 근대 만주주의(자본가/중산층)다.
자유주의 정신(사상)과 민주주의 현실_실존(제도)이 결합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현시대에서도 여전히 사상과 제도는 대적점을 보이고 있다. 민주주의 역시 사상을 만들어가 있는 중이다.
요즘 미국의 마가 세력의 뿌리는 자유주의에 두고 있지만 그것은 변형된 것인데, 여기에 감성은 제거되고 분출적 힘만 남긴 것과 같아서 자꾸 괴물이 연상되는 것이다. 니체의 사상에서 감성을 제외하고 힘적 분출만을 얼기설기 엮은 것 같은 느낌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 미(이성/균형)'와 결합하여 디오니소스의 힘적 분출이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이것과 저것의 만남이며 결합이다. 섞이지 않은 순수가 아니다. 결합만이 그 어떤 것을 더 완전하게 한다.
몽테뉴가 <에세>에서 '신'을 언급한 이유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 뿐만 아니라, 결코 도달하지 못한, "우리는 존재와 아무런 교류가 없다"라는 이 명제를 제시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 누구도 신과 교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몽테뉴에게 존재는 '신'이고 인간은 아직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이 존재로 오고 있되 아직 완전히 존재하지 않거나 태어나기도 전에 죽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 존재인 것 같지만 존재가 되지 못하고 죽기 때문이다. 비존재라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