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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감각의 불확실성이 인간의 매력

비현실적인 것과 신체의 상태

by 아란도






나무뿌리가 빨아들인 수분이 줄기, 잎, 열매가 된다. 공기는 하나이지만, 나팔에 적용하면 수천 가지 소리가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런 식으로 사물의 다양한 성질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 감각인가, 아니면 사물들이 본래 그렇게 다양한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런 의문을 품고서 어떻게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단정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병이나 정신착란, 잠 등의 예외적인 상황이 사물을 건강한 사람, 현명한 사람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과 다르게 보여 주는 것을 보면, 우리의 정신 상태와 본연의 기질 역시, 변질된 기질처럼 제 조건에 따라 자기에게 끼워 맞춰서 사물의 한 존재 양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절도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과도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저 나름의 사물관이 왜 없을 것이며, 자기 성격에 따라 그것을 사물들에 왜 새겨 넣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상태가 사물들을 제게 맞춰 제 식으로 변화시키니, 우리는 어느 것이 사물의 진정한 상태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무엇이건 우리 감각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컴퍼스, 각도기, 자가 바르지 못하면 그것들로 측정한 모든 비율, 그것들로 재서 세운 모든 건축 또한 불충분하고 불안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감각의 불확실성은 그것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 <에세 2> 12장 중에서 발췌 -



이렇게 결국 한 건축물을 지을 때,
처음부터 부정확한 자를 쓰고,
각도기가 삐뚤어 수직에서 멀어지고,
수평이 어느 쪽으로 약간만 기울어도,
건물 전체가 필히 잘못되고, 기울고,
기형이 되어 튀어나오고, 앞뒤가 기울며,
귀가 맞지 않아, 벌써 어떤 곳은 무너질 테세요,
곧 실제로 와르르 무너진다.
맨 처음 계산이 틀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만적인 감각에 의존하면
사물들에 대한 그대의 추론 전체가
필히 부정확하고 틀린 것이 되리라.
_루크르테우스_








위의 시에서 보듯이 루크레티우스도 가변적인 감각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보이는 자기 인상을 시로 썼다. 결국 그렇게 따지면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 된다. 감각이 가변적인 것이 아니라, 그때의 상태가 가변적인 것은 아닐까? 즉 대상과 내가 가변적이다. 대상은 늘 변화하고 우리의 감정 역시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대상과 대상이 접촉할 때의 그 상태가 가변적이 것이다. 감각은 항상 어떤 것을 보던 대로 본다. 시각은 그저 본다. 청각은 그저 듣는다. 미각은 그저 맛을 본다. 피부는 그저 감촉한다. 후각은 그저 냄새를 맡는다. 감각의 기능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상황이나 대상과의 관계가 바뀐 것뿐이다. 즉 그 자신의 감정이 바뀐 것이다. 또는 신체의 상태가 달라진 것이다.


맨 정신으로 세상을 볼 때와 술을 마시고 세상을 볼 때는 뭔가 다르다. 신체가 술에 취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알코올이 신체에 가한 마취 때문일 수도 있다. 기쁨이 솟구치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것이고, 슬프면 세상이 우울하게 보일 것이다. 같은 색상이라도 그 빛이 그 자신에게는 다르게 전달될 것이다. 감각 기능은 그저 대상을 매개할 뿐이다. 이것은 안에서의 문제이지 바깥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감각 탓만은 아니다. 초기불경의 육근청정의 의미는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을 말함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인류 문명을 기록하여 보관하여 수학적 토대로 어떤 기준을 만드는 이유도 감각의 유동성 때문일 것이다. 기분에 따라 달라지지만, 인간은 지적 훈련에 의해 그 오류를 극복한다. 계량형 통일과 평균율을 가지고 어떤 기준점을 만든다. 표준 시간의 기준을 정해 놓는 것처럼. 역사적으로는 그리니치 천문학적 관측 기준을 평균시로 삼지만, 기술적으로는 UTC(협정 세계시) 원자시계를 기반으로 한 국제 표준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시간은 공식적으로 UTC이며 한국 시간은 지역 시간 UTC+9로 설정되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시간도 UTC+9를 사용한다. 요즘은 거의 모든 시간을 보는 기준이 스마트폰 시간이다. 당신과 나의 시간의 오차가 없기 때문이다.


사물을 보고 감정이나 생각은 다르게 일으킬 수 있어도 어떤 것에 적용되는 것은 사람들은 과학적 툴을 쓰거나 이미 마련된 수학적 토대 위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감각이 일으키는 오류는 감각이 손상되었을 때이다. 이것이 신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때로는 시나 문학, 게임처럼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더 리얼리티를 우리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풍토 위에서 이 모든 것들을 향유하며 살아간다.


이토록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생산되는 시대가 이제까지 있었는가? 그런데도 그것은 그 어떤 현실적 경험보다도 인간을 더 끌어들인다. 고대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야기가 없는 세상, 사물을 해석하는 인간의 정신이 없는 세상이라면 그것은 불균형하여 애초에 감각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감각이 주는 아름다움과 불안을 들보를 걷는 느낌처럼 스릴 있게 건너보는 것 역시 필요한 것이리라. 우리는 이것 때문에 여전히 좌충우돌 힘겹지 않은가 말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감각의 문제는 항상 인간과 함께 하고 있다. 절대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서 가야 하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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