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드라마의 글로벌 성공을 이끈 첫 번째 외부 환경
K-Drama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탐색하고 있다. 큰 틀에서 1부 정책 편, 2부 외부 환경 편, 3부 사업자의 대응 편으로 정리를 하고 있다. 오늘 이 글은 2부 1장에 해당한다.
민주주의가 때로 피를 먹고 자라듯, 한 산업의 운명 또한 특정한 물리적 조건과 시대의 바람 속에서 결정된다. 그 바람은 때로는 순풍이 되어 거친 바다를 가로지를 힘을 주지만, 때로는 거친 역풍이 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한다. K-드라마라는 거대한 물줄기도 그러했다. 우리는 흔히 K-드라마가 전 세계를 휩쓰는 'K-컬처'의 심장이라 말하지만, 그 심장이 뛰기 시작한 첫 순간은 우연이나 천재들의 발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격동의 대한민국이 마주했던 국내외 환경이라는 거대한 '바람의 길목'에서 시작되었다. 눈부신 경제 성장의 풍요로움과 함께 찾아온 대중의 욕망, 기술 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시각, 그리고 세계화의 파고 속에서 던져진 생존의 질문들. 이 모든 외부 환경이 씨앗이 되고, 물이 되고, 때로는 거친 바위가 되어 K-드라마의 '삶'을 결정지었다. 2부는 이 거대한 '시대의 바람', 즉 외부 환경 그 자체가 어떻게 K-드라마라는 산업의 토대를 만들고, 그 항로를 결정하며, 운명을 뒤바꾸어 왔는지, 그 거대한 힘의 맥락을 탐색하는 여정이다.
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때로는 잔혹한 시련으로 다가왔던 그 운명의 바람 속에서, K-드라마는 스스로의 DNA를 새겨나갔다. 이 이야기는 그 바람의 시작점, 즉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 모든 욕망이 들끓던 용광로의 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컬러'가 시대를 물들이다 (The Visual Revolution)
모든 것의 시작은 1980년 12월 1일이었다. 이날, 전두환 신군부가 5.18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 직후 국민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이른바 '3S 정책(Screen, Sports, Sex)'의 일환으로 '선물'처럼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 의도야 불콰했지만, 흑백 브라운관이 총천연색으로 물든 이 사건은 단순한 기술의 진보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시각 패러다임'을 뒤바꾼 또 다른 의미의 혁명이었다.
사실 이 '컬러 방송'의 이면에는 '올림픽 유치'라는 또 다른 국가적 목표가 숨어있었다. 1981년 9월, 88 서울 올림픽 유치가 최종 확정되기까지 대한민국은 일본의 '나고야'와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1960년에 이미 컬러 방송을 시작한 기술 강국 일본을 상대로, 1980년에도 여전히 흑백 TV를 보는 나라가 '세계인의 축제'를 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1980년 12월 1일의 컬러 방송 시작은, '우리는 올림픽을 치를 역량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유치 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국가적 '의지의 표명'이자 '인프라 투자'였던 셈이다.
그래서 '컬러'의 등장은 분명 정치적이다. 우리는 이미 1970년대 컬러 TV 수출국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4년, 삼성과 금성(현 LG)은 컬러 TV(일명 '수출용')를 생산할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삼성은 '이코노' TV, 금성은 '화려한' TV로 개발을 마쳤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국내 시판을 금지시켰다.
두 기업은 70년대 내내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창고에 묵혀둔 채 수출만 해야 했다. 그러다 1980년 12월, 마침내 '봉인'이 풀린 것이다. 그래서 혁명의 전파 속도는 경이로웠다. 70년대 내내 억눌렸던 수요와, '컬러'라는 신세계를 향한 열망, 그리고 올림픽을 향한 국가적 자신감이 폭발했다. 컬러 TV 보급률은 1980년 5% 미만에서 불과 5~6년 만인 1985년 50%를 넘어섰고, 88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는 사실상 전 국민이 컬러 TV를 소유하게 되었다. 10년도 안 되어 세상이 흑백에서 컬러로 완전히 바뀐 것이다. 모든 것이 속도전이었던 대한민국의 기세는 컬러 TV 보급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시각 혁명'은 즉각 드라마 제작 현장을 덮쳤다.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삐걱거리는 세트장을 컬러 TV는 숨기지 못했다. 시청자들은 '색(色)'을 원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80년대 드라마의 모순적인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난다.
하나는 3S 정책의 'Screen'에 충실한 저급한 오락물의 범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슬 퍼런 시대상 속에서 '정치'나 '사회'를 정면으로 언급하지 못하게 되자, 창작자들은 '순수 문학'이라는 안전 하면서도 격조 높은 영역으로 눈을 돌렸다. 이미 검증된 문학 작품을 다루는 것은, 정치적 검열에서 벗어나면서도 '작품성'을 추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바로 이 맥락에서 <TV 문학관>(KBS, 1980년)과 <베스트셀러 극장>(MBC, 1983년) 같은 단막극들이 탄생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낡은 세트장을 벗어나 전국 방방곡곡의 풍광을 담아내며, 문학적 감수성을 '컬러 영상미'로 번역하는 예술적 실험의 장이 되었다. K-드라마가 '보는 즐거움'과 '이야기의 깊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당연히 새로운 '비용'을 의미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촬영팀, 컬러 화면에 맞는 정교한 조명,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 사실적인 세트 디자인. 이 모든 것은 '돈'이었다. 다행히, 당시 한국 사회는 이 비용을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뜨거운 '돈'으로 들끓고 있었다.
중진국이 된 한국, 욕망이 터지다. (The Economic Engine)
80년대의 컬러 혁명이 '기술적 토대'였다면, 동시대를 관통한 경제 성장은 K-드라마라는 거대한 산업을 움직일 '물리적 연료'였다. K-드라마의 성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1980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 1,734달러라는 숫자의 의미를 먼저 해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6.25 전쟁 직후인 1953년의 67달러, 혹은 1970년의 253달러에서 수십 배 뛰어올랐다는 산술적 의미가 아니다. 이는 전 세계 경제 발전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소비의 1차 임계점(The First Tipping Point)'을 돌파했다는 신호였다.
경제학적으로 1인당 소득이 1,000달러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국가는 '절대 빈곤', 즉 '생존(먹고사는 문제)'의 단계에서 벗어난다. 소득의 거의 전부를 식량과 의복에 쏟아붓던 '엥겔 지수'가 급격히 꺾이고, 역사상 처음으로 '재량 소득(discretionary income)', 즉 쓰고 싶은 곳에 쓸 수 있는 '잉여의 돈'이 대중의 손에 쥐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 바로 1인당 소득 1,000달러다. 잉여 소득'이 향하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바로 '내구 소비재(Consumer Durables)', 즉 TV, 냉장고, 세탁기다. 한국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1950년대 미국이 그랬고, 1960~70년대 일본과 서유럽이 먼저 이 길을 걸었다. 1980년의 1,734달러는, 마침내 대한민국에 '컬러 TV를 구매할 수 있는 대중(시장)'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축포였다.
이 폭발적인 성장은 '3저 호황(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이 겹친 80년대 중후반에 정점을 찍는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간, 한국은 연평균 12.6%라는 경이적인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1인당 GNI는 1990년 6,500달러, IMF 직전인 1996년에는 13,000달러를 돌파하며 16년 만에 7.5배가 넘게 성장했다. 이 숫자가 바로 '중산층'이라는 강력한 소비 주체의 등장이자, K-드라마의 든든한 '시장' 그 자체였다.
드라마의 연료, TV 광고의 폭발적 성장
이 거대한 중산층 시장을 잡기 위해 기업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이 돈이 K-드라마의 '실탄'이 되었다. 바로 '광고 시장'의 폭발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총 광고비'가 아니라 K-드라마의 직접적인 자금줄인 'TV 광고비'의 성장세다. 80~90년대는 그야말로 TV의, TV에 의한, TV를 위한 시대였다. 1993년에는 TV 광고비 총액이 신문광고비를 넘어섰다. TV의 시대가 된 것이다.
구체적인 숫자가 이를 증명한다. 1981년, 컬러 방송이 막 시작되었을 때 연간 약 1,500억 원 규모였던 TV 방송 광고비는,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폭증하기 시작해 1996년(IMF 직전) 약 3조 1,800억 원에 달했다. 불과 15년 만에 TV 광고 시장 하나만 21배 넘게 성장한 것이다.
이는 당시 TV가 모든 매체를 압도하는 '왕좌'에 앉아있었음을 의미한다. 1991년, 이 황금 시장을 노리고 SBS라는 새로운 민영 방송사가 출범하며 경쟁은 극에 달했다. (이는 정책 파트에서 다루었지만, 이 경제적 배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KBS, MBC, SBS 3사 간의 '시청률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의 최전선에 선 무기가 바로 '드라마'였다. 0.1%의 시청률이라도 더 끌어올리기 위해, 방송사들은 이 막대한 광고 수익을 드라마에 쏟아부었다. 더 많은 광고를 따내기 위해, 방송사들은 시청률을 보장하는 스타급 작가와 배우에게 막대한 '개런티(출연료)'를 지불하기 시작했다.
'스타 시스템'이 공고해진 것이다. 또한 더 자극적이고, 더 화려하며, 더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제작비 경쟁이 불붙었다.
나를 표현하는 X 세대의 등장, TV의 주류가 바뀌다
80년대의 경제적 풍요는 신인종을 낳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 TV 인간이다. 오늘날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말처럼 90년대 등장한 X 세대는 컬러 TV와 같이 자란 최초의 세대였다. 이들은 197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의 '컬러 TV'와 '경제 호황'을 보고 자란 인류사적 '신인류'였다. '보릿고개'와 '전쟁'이라는 부모 세대의 트라우마, '국가'와 '집단'을 앞세우던 유교적 가치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첫 번째 세대였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를 외치며 등장했을 때, 이는 기성세대의 문법을 거부하는 신인류의 출현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아닌 '나'를 주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의 개성, 나의 취향, 나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했다.
이전까지 TV의 주인은 단연 '어른'이었다. 드라마는 아버지가 채널을 독점한 거실에서, 온 가족이 함께 보며 교훈을 얻는 '가족 엔터테인먼트'였다. <전원일기>나 <사랑과 야망>처럼 묵직한 서사와 어른들의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X세대는 이 '교훈'을 거부했다. 그들은 부모 세대의 홈드라마나 국가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반공 드라마에 채널을 돌렸다. 그들이 원한 것은 자신들의 이야기, 즉 '나'의 연애, '나'의 성공, '나'의 스타일이었다. 바로 새로운 다양성의 등장이다.
이 '새로운 눈'을 가진 시청자들은 이미 '컬러 TV 세대'였다. 텍스트보다 이미지에 익숙했고, 느린 호흡을 견디지 못했다. 이들의 상징적인 공간은 '압구정동'이었다. 부모의 부를 기반으로 고가의 외제차를 몰며 자유분방한 소비문화를 즐기던 이들, 소위 '오렌지족'의 등장은 기성세대에겐 충격이었지만, X세대에겐 선망이었다. 방송사들은 이들의 욕망에 즉각 반응했다. 1992년 <질투>는 X세대의 감수성을 정확히 저격했다. 최수종과 최진실의 쿨한 연애담, 감각적인 영상, 그리고 드라마의 모든 장면을 지배했던 유승범의 OST는 완벽한 삼박자였다. <질투>의 OST 앨범은 100만 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는데, 이는 드라마의 '배경음악'이 하나의 독립된 '상품'이자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이후 <마지막 승부>, <사랑을 그대 품 안에> 같은 '트렌디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드라마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대 X세대가 욕망하는 모든 것의 '카탈로그'였다. 주인공의 패션, 자동차, 직업(광고 기획자, 디자이너, 재벌 2세), 그들이 가는 카페까지 모든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20대 청춘이 비로소 TV의 중심, 시대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었다.
세계의 유입: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각성 (The Global Awakening)
80년대 내내 축적된 이 내부의 에너지는 '세계화'라는 거대한 외부의 충격과 만나며 그 방향성을 완성했다. 이전까지 '우물 안'에서 안락하게 성장하던 K-드라마가 '세계'라는 무대로 강제로 끌려 나온 것이다.
그 시작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라는 '문화적 빅뱅'이었다. 88 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 "우리 이만큼 잘 산다"라고 과시한 거대한 '쇼케이스'인 동시에, 전 세계의 문화가 한반도에 밀려 들어온 '문화적 빅뱅'이었다. 국민들은 안방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과 문화를 목격하며 '눈높이'가 순간에 글로벌 스탠더드로 상향 평준화되었다.
이듬해인 1989년에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었다. 80년대의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수많은 한국인이 파리, 뉴욕, 도쿄로 쏟아져나갔다. 이들 중에는 K-드라마를 만들던 PD, 작가, 스태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었다. 뉴욕 브로드웨이의 압도적인 무대, LA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거대한 시스템, 그리고 특히 일본 후지 TV의 세련된 트렌디 드라마를 직접 목격했다.
‘새로운 각성’의 순간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창작자들은 '각성'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만들던 스튜디오 중심의 답답한 드라마, 교훈적인 대사, 촌스러운 패션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는지 통감한 것이다. '압구정동 문화'로 상징되는 X세대의 욕망은, 바로 이 '해외물을 맛본' 창작자들이 국내에 이식한 '선망'의 반영이었다.
올림픽과 같은 해인 1988년, 할리우드 직배사의 상륙은 '문화의 홍수'이자 '직접 경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UIP(유나이티드 인터내셔널 픽처스)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직배사가 상륙한 것은 '문화 전쟁'의 시작이었다.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 등으로 인한 거센 시장 개방의 압력은 한국의 스크린을 무방비로 노출시켰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탑건>, <다이하드>, <사랑과 영혼>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압도적인 자본력과 화려한 볼거리로 극장가를 휩쓸었다. 뿐만 아니었다. X세대는 한쪽으로는 <영웅본색> 같은 '홍콩 누아르'에 열광했고, 다른 한쪽으로는 불법 복제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예: 드래곤볼, 슬램덩크)을 보며 자랐다.
이미 10대, 20대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에게 옆 방송사 드라마와의 비교는 무의미했다. K-드라마의 경쟁 상대는 이제 톰 크루즈와 주윤발이 되었다. 그들에 비해 당시 K-드라마가 한없이 '촌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모든 흐름은 1996년 12월, 대한민국이 '선진국 클럽'이라 불리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며 정점을 찍었다. 이는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라는 변명 뒤에 숨을 수 없음을 의미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세계 시장'에 편입되었으며, 이제 모든 것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
이 '글로벌 스탠더드'와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생존의 압박, 그리고 해외에서 직접 보고 배운 창작자들의 '각성'. 이것이 바로 90년대 K-드라마가 스스로 '체질 개선'을 하도록 강제한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
<K-영상산업의 성공 비결>(The Secret behind Global Success of K-Drama)는 매주 찾아옵니다.
서문: K-영상산업의 성공신화: 그 비밀을 파헤치다
Part 1. K-드라마 성공 신화의 정책 기반
1. 검열폐지, 창작자의 상상력을 해방시키다.
2. 3% 나비효과, 외주 제작 의무화 정책이 산업을 만들다
3. 보도 권력을 통제하려다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다
Part 2. K-드라마 성공을 이끈 내외 환경
1. 들끓는 욕망이 이끈 TV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