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여행의 로망들

앞면과 뒷면 - 여행의 기록 중에서

by 홍지

“여행하다 보면 근사한 로맨스 한 번쯤 생길 줄 알았죠.”


근데 안 생겨요. 이집트에서 만난 친구가 말했다. 한국을 떠난 지 벌써 두 달 째인데 로맨스는커녕 마음 맞는 친구 만나기도 쉽지 않다고. 인도에서 한 번 좋은 인연을 만날 뻔했는데 타이밍이 어긋나 그만 안타깝게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려주며 맥주를 따랐다. 우리는 왜 여행할 때 운명적인 만남이 생기길 기대하는 걸까? 그런 만남은 자주 일어날까? 한 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그건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보며 내 사랑의 해피엔딩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은 아닐지. 물론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여행 중에 처음 만나 사귀고 한국에서 결혼식을 한 후 그들의 첫 여행지로 신혼여행을 다시 왔다고 했다. 내 경험으로 일 년 간 딱 한 커플이었다. 이러한 일이 모두에게 일어날 수는 없다는 것. 남들에게는 쉬운 일 같은데 자신에게는 영영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며 그는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영어는 저절로 늘 줄 알았는데...”


절대 안 늘어요. 어쩌죠 흑흑. 여행 넉 달째 접어든 그녀는 생각만큼 영어가 늘지 않는다며 자신을 한탄하고 있었다. 몇 달간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영어가 늘면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는 것이 그녀의 애초 계획이었다. 하지만 외려 가는 곳마다 현지인들과 어울려 노느라 현지어가 더 는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영어실력이 해외 체류기간과 비례했다면 나도 지금쯤 중학교 영어 수준을 벗어났어야 했다. 여행자는 생활인이 아니기에 쓰는 표현도 한정적이다. 애초에 영어를 목적으로 했다면 여행이 아닌 연수를 가야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면 영어도 늘고 외국인 친구도 쉽게 사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 노력 없이 떠나는 것 자체로 이 모든 경험들을 자동으로 얻게 된다고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여행 글과 사진들이 우리를 유혹하는지도 모른다. 떠나기만 한다면, 이 모든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날 거라고. 그녀는 그런 책들에 속은 기분이라고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대형서점에서 일을 했는데 그때 항상 여행책을 읽으며 긴 배낭여행에 대한 로망을 키워 왔단다. 누구나 일상을 멈추고 떠날 권리가 있는 거라고. 그곳엔 새로운 세계가 있을 테니 정말 하루하루가 신날 줄만 알았다고.



“여행 중에는 매일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혼자여서 심심할 때가 많아요. 그녀는 너무 쉽게 고백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 멋지기만 하고 늘 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흘러가는 날들을 견뎌야 하고, 심심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면 모두들 그녀를 부러워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여행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든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그녀의 자구책은 심심할 때마다 카페에 앉아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다 쓴 편지는 한국에 있는 집 주소로 부친다. 그렇게 편지를 쓰면 위로가 된다고 했다. 나중에 돌아가 그 편지들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고. 혼자서 훌쩍 떠나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녀의 심심함을, 여행의 여백 같은 순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여행은 그 외로움마저 황홀하게 포장해주는 포장지다. 그래서 여행이 끝나고 나면 그 무미했던 날들 마저 그토록 그리워하는지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 낭만적일 것 같아요!”


이번에는 그녀가 내게 묻는다. 글쎄요. 나는 대답했다. 단 며칠 만의 여행이라면 충분히 로맨틱할 거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짧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애틋하지 않은가. 함께 하는 시간이 짧으면 자체 편집이 가능하다. 서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일 년 가까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한 마디로 편집이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서로의 원본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 열 시간 넘게 장거리 이동할 땐 서로의 얼굴에 기름이 어떤 모양으로 번져나가는지 보게 되고. 갑자기 터져 나오는 생리현상을 숨길 틈 없이 목격당하기도 한다. 한 번은 배탈이 심해서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거린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난 전속력으로 융에게 달려가 볼륨을 최대로 키운 이어폰을 양쪽 귀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앉아 기도했다. ‘신이시여, 제발 나의 응가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도와주소서.’







이 책은 ‘1년의 여행’이 그 후 돌아온 ‘10년간의 일상’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삶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여행의 기록’과 ‘일상의 기록’이 같은 테마로 교차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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