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돈 - 여행의 기록 중에서
무엇이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가?
스물일곱. 입사 삼 년 차. 몇 달 후면 대리로 진급하고 연봉도 오른다. 그때 나의 결정은 퇴사였다. 모은 돈 탈탈 털어 여행을 떠날 때 주위에 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이 시작되니 길 위에는 온통 나 같은 사람들뿐이었다.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이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사회적 소속에서 벗어나 여행 중이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장기 여행 중이라니. 반가웠고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다 무슨 돈으로 이토록 긴 여행을 하고 있을까? 태어날 때부터 돈이 많았나, 여행비가 떨어지면 다시 돈을 모아서 여행을 나오는 걸까? 여행하는 동안 남모를 재테크라도 하고 있는 걸까?
긴 여행을 떠날 때 가장 필요한 건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다. 맞다. 하지만 이 마음 하나로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고 말하는 낭만주의자가, 나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건 돈과 시간이다. 현실을 당장 멈춰 세워도 상관없을 만큼의 시간과 돈. 그렇다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큼의 돈과 시간이 필요한 걸까?
여행자에게는 얼마큼의 돈과 시간이 필요한 걸까?
우리가 여행하던 시기는 한국의 원화 가치가 더할 나위 없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였다. 태국에 머무는 다섯 달 동안 둘이 합쳐 삼백만 원 정도의 돈을 썼는데 일 년 전에 왔더라면 같은 생활을 하는 데 이백만 원이면 충분했을 거다. 그때 태국에서 만난 한 여행자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환율이 높아져서 괜히 돈 더 쓰는 것 같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난 환율이 높을 때 돈을 더 썼더라고요. 환율이 낮으면 그만큼 돈을 아낄 것 같지만 싸니까 그만큼 더 쓰게 돼. 지금은 환율이 안 좋으니 어딜 가도 아끼자는 마음으로 다니니 그때보다 상대적으로 덜 쓰죠. 결국 쓰는 돈은 똑같은 셈이에요.”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여행자는 이 말이 큰 위로가 된다고 했다. 나는 씩씩거리며 그래도 환율이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말을 한 여행자는 빠이에 머무는 사흘 동안 삼십만 원을 썼다고 했다. 우리의 한 달 생활비였다. 아.. 저렇게 돈을 평소에 많이 쓰시는 분이니 고환율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나 보다. 나는 그가 가진 돈으로부터 나오는 그 여유가 부러웠다. 기분이 좋았는지 이 여행자는 그 날밤 우연히 만난 여행자들의 술값을 자신이 전부 계산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여기 몇 달 더 머문다고 하셨죠. 여유 있어서 좋겠어요. 부럽네요.”
상대적이고 절대적으로 흐르는 시간과 돈
“베를린 마켓에 나가서 돈을 번다고요? 대단하네요.”
베를린에서 몇 년째 유학 중인 친구가 우리에게 한 말이었다. 그때 우리는 생활비가 똑 떨어져 주말마다 마켓에 나가서 돈을 벌고 있었다. 유학생들은 생활비가 필요하면 보통 아르바이트를 한다. 마켓에 나가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이 있는 일상인으로서 시간 대비 효율이 좋은 일거리를 찾는 게 맞다. 우리는 아니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인 여행자였다. 많은 시간을 쓰게 되더라도 즐거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효율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평일에 하는 일이라곤 마트에서 사 온 식재료로 그날 끼니를 해 먹는 게 정해진 일과의 전부였다. 우리는 주말 마켓을 위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모든 시간을 할애해 상품들을 직접 만들고 물건을 놓아 둘 진열대도 만들었다.
돈이 많지만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는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다. 대부분 그 시간에 고효율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한다. 돈을 쓰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시간이 많은 여행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진다. 주어진 시간을 모두 쓰는 것과 그 시간의 일부를 돈으로 바꾸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 여행 초반에 우리는 전자의 방식으로 생활하는 여행자였다. 하지만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잔고에 후자로 변해갔다.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대한의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돈으로 최대한의 시간을 벌자.
“오늘 머리를 했는데 30만 원이 나왔어요. 너무 낭비했죠?”
런던에서 이 주간 홈스테이를 할 때였다. 공동 부엌에서 만난 한 친구가 오늘 머리를 했는데 삼십만 원을 썼다고 했다. 요즘 우울해서 기분 전환을 할 겸 자기 형편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미장원에 갔다고. 그러면서 후회를 했다. 나는 예쁘게 잘 된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가 그날 미장원에서 쓴 돈은 정확히 우리의 이 주치 방값이었다.
여행이 시작되고 나는 한 번도 미용실에 간 적이 없었다. 옷에 구멍이 나면 바느질을 했고 신발은 밑창이 떨어질 때까지 신고 다녔다. 그녀처럼 기분전환으로 큰돈을 쓰는 일은 지금의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부럽단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나도 그녀처럼 낭비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시간이었다. 넘쳐나는 시간을 내 마음껏 소비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미장원에서 말도 안 되는 돈을 쓰며 기분 전환을 하듯이 우리는 많은 시간을 말도 안 되는 최저가 표를 찾으며 기분 전환을 했다. 도시 간의 이동은 항상 초특가로만 움직였다. 한 항공사의 취항일에 맞춰 표를 예매해 쿠알라룸푸르에서 런던까지 17만 원에 날아올 수 있었고, 평일 야간 버스표를 끊어 아일랜드에서 영국까지 단 돈 1파운드에 넘어갔다. 대부분이 잘 이용하지 않는 시간대는 파격적으로 저렴했다. 시간을 낭비하는 기쁨은 더 있었다. 평일 대낮의 유럽 도심의 공기를 마시며 정처 없이 거리를 누비는 일, 아무 계획 없이 건물 간판과 대문 색깔만 보고도 즐거워하거나 바닥의 돌 틈에 낀 꽃을 한참 들여다보는 일들. 그건 명백히 시간이 넉넉한 여행자의 일이었다.
장기 여행의 장점은 대부분 돈보다는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살면서 이토록 많은 시간이 쏟아져 내리던 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여행 내내 마음껏 시간을 낭비했다. 이때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영영 시간을 낭비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했을 거다.
그때그때 삶에 필요한 여행이 있다. 그건 결국 두 가지 형태다. 시간이 한정된 여행과 돈이 한정된 여행. 둘 다 한정되어 있다면 쫓기듯이 여행할 확률이 높고 둘 다 한정되어 있지 않다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높지 않다.
이 책은 ‘1년의 여행’이 그 후 돌아온 ‘10년간의 일상’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삶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여행의 기록’과 ‘일상의 기록’이 같은 테마로 교차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