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걸 그냥 하면 돼

질투를 넘어 부러워할 용기 - 여행의 기록 중에서

by 홍지

한국에서는 나도 부럽다는 말 제법 듣고 나왔는데 노르웨이에 오니 온통 내가 부러운 것 투성이다. 이 축복받은 천혜의 자연환경. 게다가 이곳은 손꼽히는 복지국가 아닌가. 별다른 직업 없이도 평생 먹고살 만큼의 생활비가 나오는 나라. 그래서인지 다른 도시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던 걸인들도 여기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우연히 오슬로(Oslo)에서 오 년째 살고 있는 내 또래 한국 여자분을 만났다. 북유럽으로의 이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궁금한 게 많았고, 대화를 시작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나는 슬슬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저 부러워서. 그녀가 마냥 부러워서였다.


그녀는 몇 해 전에 아기를 낳았는데 출산 몇 달 전부터 출산 준비금으로 팔백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 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나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매달 정부로부터 양육비를 받는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학생이어서 학교에서도 돈을 받았다고. 이중으로 돈을 받은 셈인데 들어보니 노르웨이에서의 학생 신분은 굉장한 것이었다. 학비 전액 무료에 생활비까지 외국인 학생들도 예외 없이 지급받는다. 그녀 같은 예술 전공의 학생들에게는 공연비도 매달 전액 지원된다고 했다. 노르웨이에 살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냐고 묻자, 그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보고 싶은 공연들만 (백만 원 가까이 되는) 한 달 내내 보며 공부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예상 못 한 답이었다. 공부하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줄이야. 학생은 공부를 하는 것이, 부모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가장 행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이 나라의 목표 같아 보였다. 학교를 졸업하면 학자금 대출 빚이 쌓이고, 결혼하면 늘어난 평수만큼 집 대출금이 쌓이고, 아이를 낳으면 자라나는 아이의 키만큼 빚을 더 쌓아야 하는 나라에서 살아온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열두 명 낳아서 축구팀도 만들어 볼 수도 있겠는걸.


P1150181.JPG 한국에선 반려견을 차에 태우듯이 이곳에선 개인 요트에 태운다.
P1170293.JPG 여름휴가 때면 어김없이 캠핑카를 몰고 떠나는 사람들


일찌감치 한국 사회와 자신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한국을 떠나왔다고 말하는 그녀. 노르웨이인 남편을 만나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그녀는 요즘 이사 갈 집을 한창 구하는 중인데 그동안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드디어 마당이 있는 집으로 간다면서 굉장히 기뻐했다. 시험 합격, 어학연수, 취직이 아니라 마당 있는 집을 꿈꾸며 행복해하는 이십 대. 나는 이런 이십 대를 한국에서 본 적이 있던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만족하고 거침없이 술술 말하는 사람. 정말 오랜만이었다. 단순히 그녀가 받는 복지 혜택들이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꿈을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하고,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사실. 그게 가장 부러웠고 동시에 큰 위안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현실을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정작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었던 나의 이십 대. 그때 그 시절을 같이 통과해 온 친구가 어느 날 말했다.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그걸 깨닫기까지 나의 이십 대를 다 보낸 것 같아.” 그 말이 기쁘면서도 허무하게 들렸다. 우리의 이십 대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늘 괴로워했으니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는 사람은 없어. 그런 삶은 사치야. 그렇게 달래느라 이십 대를 다 보냈는데. 애초에 그런 고민 따위 할 필요 없이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짧지만 강렬했던 딱 한 번의 만남. 오랜만에 느껴보는 타인에 대한 강렬한 부러움. 여행하는 동안 잊고 지냈던 한국 현실에 대한 막막함. 돌아가면 한국에서 다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게는 아직 답이 없었다.






이 책은 ‘1년의 여행’이 그 후 돌아온 ‘10년간의 일상’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삶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여행의 기록’과 ‘일상의 기록’이 같은 테마로 교차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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