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돈 - 일상의 기록 중에서
“한국 춤! 그렇지, 잘한다 잘한다! 이번엔 미국 춤!”
내 손에 백 원이 들어온다. 이백 원이 들어온다. 춤은 계속된다.
“이번엔 유럽 춤! 아프리카 춤!”
할머니의 호령에 맞추어 나는 어디서도 본 적 없지만 무엇이든 출 수 있는 댄서가 되어 고개를 흔들고 가슴을 펄럭이고 옆구리를 돌리고 엉덩이를 튕겼다. 나를 둘러싼 관객들(할머니의 친구분들)이 춤을 다 다르게 추는 게 용하다며 내 손에 용돈을 쥐여주었다. 이건 아마도 내 생에 첫 밥벌이였다. 생애 첫 벌이는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걸 했고 그걸로 뜻밖의 수익도 났고 그 돈을 엄마에게 드리는 효도를 함과 동시에 모든 의식주를 부모로부터 보장받고 있어 여전히 돈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 뒤로 살아오며 수많은 형태의 밥벌이를 했다. 하지만 춤을 출 때만큼 신나지는 않았다.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밥벌이가 신나기란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생에 절반 이상의 시간을 밥벌이에 쏟아붓고 살게 될 것이다. 좋아하지 않는 일들을 하며 지루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간을 잘 보내는 것만으로도 생의 절반은 즐거울 테니까.
여행이 끝나갈 때 즈음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돌아가면 뭘 할 거예요?”
그때마다 나는 대답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회사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예요.”
하고 싶은 걸 묻는 질문에 하고 싶지 않은 걸 대답했다. 여행이 끝나갈 때 즈음이면 자연스럽게 돌아가 하고 싶은 게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꼭 하고 싶은 한 가지가 없을 땐 하고 싶지 않은 한 가지라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회사로 돌아가지 말자.
전혀 다른 길
이십 대 내내 좋아하는 일을 찾아다녔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은 대부분 재미있는 일들이었다. 그런 일들은 대부분 처우가 좋지 않았다. 돈을 못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그 경력으로 나는 가고 싶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부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출근 첫날 인사 담당자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축하해요. 삼 백대 일을 뚫고 우리 회사에 오 년 만에 들어온 신입사원이네요.”
하지만 나는 회사를 다니는 내내 건강하지 못했다. 하루만 더 출근하면 죽을 것 같은 어느 날 사직서를 냈다. 좋아하는 일을 했고 충분한 돈을 벌었고 사람들은 내게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말했고 스스로도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좋은 것들 안에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너무 바쁜 나머지 노동 시간이 내 일상을 모두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새벽까지 마감을 쳐내는 생활.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났다.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희미해져 갔다. 읽지 못하는 책, 보고 싶은 영화,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쌓여만 가는데 내 일상은 회사 일에 둘러싸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돈을 벌어 내 시간들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며 살고 싶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일은 그런 시간을 주고 있지 않았다. 나는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회사를 그만두며 깨달은 것 한 가지.
나는 돈을 잃어버리는 두려움보다
시간을 잃어버리는 두려움이 더 큰 사람이구나.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삶에서는 직장이 아닌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돈보다는 시간을 버는 일을 하고 싶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일 때문에 친구와의 약속을 깨지 않아도 되는 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사람을 보는 시간이 더 많은 일. 한국에 살면서도 외국인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고 이왕이면 해외에서도 할 수 있는 일.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말과 글을 평생 공부할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서른에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이 책은 ‘1년의 여행’이 그 후 돌아온 ‘10년간의 일상’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삶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여행의 기록’과 ‘일상의 기록’이 같은 테마로 교차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