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면 껴안기

앞면과 뒷면 - 일상의 기록 중에서

by 홍지

앞면보다 매력적인 뒷면


여행에서 돌아와 한동안 세상의 모든 이면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 생겨난 습관은 원래도 잘 믿지 않던 세상의 말들을 더 믿지 않게 된 거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가 두터운 미디어나 유명한 전문가들에 대해서는 유독 더 그랬다. 뉴스 내용을 그대로 믿는 친구들에게 다가가 “저 이면엔 이런 게 있지 않을까?”라며 끊임없이 의심을 불러일으켜야 직성이 풀렸고. 자기 계발서로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정작 본인의 삶은 엉망진창이라거나 전문 분야에서 신망이 두텁던 인사들이 차례차례 구설수에 휘말릴 때면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마음만 강화됐다. 세상의 옳고 그름이 때론 종이 한 장 보다 연약하게 나뉜다는 사실에 흠뻑 빠져서 어떤 것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상태로 쭉 살아갔던 것 같다.


그것이 앞면만 보는 삶보다 훨씬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으로 살아갈 때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무엇에도 쉽게 실망하지 않는다는 데 있으니까. 애초에 좋은 면만 있을 거라는 기대가 없기 때문에 어떤 상상 이상의 이면이 밝혀져도 웬만해선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생각에 휩싸여 있는 내가 보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면만 보고 쉽게 기뻐하거나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늘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마치 서울에 장기 체류 중인 외국인 여행자처럼. 사람들은 대체로 선하다가도 별안간 악해질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만든 법과 제도는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언제든 옥죌 수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위해 살다가도 한 순간 타인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삶의 아이러니가,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뒷면에 사로잡힌 여행자


“올레길 어때요? 저도 한 번 가보려고요.”


한 사람이 제주도를 열 번 넘게 다녀온 한 여행자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별로예요, 위험해요, 가지 마세요.” 그는 단호해 보였다. 얼마 전 올레길을 혼자 걷던 여성 여행자가 봉변을 당했다는 얘기까지 애써 덧붙였다.


그 자리에 있던 여행자들이 기대하던 답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올레길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 깨지는 얘기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 사람 왜 이러는 걸까? 그런데 왠지 나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기대치가 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하는 행동. 자신이 먼저 선수 쳐 놓는 그런 느낌. 어쩌면 긴 여행을 다녀와 한동안 나도 그런 상태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다.


“파리는 낭만적이야? 이집트 사람들은 친절해? 피라미드는 어땠어?”


기대하며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가감 없이 말했다. “파리 지하철에서 맡은 오줌 지린내가 너무 충격적이었어. 카이로 식당 종업원이 날 아시아인이라고 인종 차별하더라고. 서양 애들한텐 엄청 깍듯하면서. 피라미드는 바로 앞까지 도로가 깔려있어서 진짜 별로였어.”


분명 좋았던 것도 많았을 텐데. 세계 여행의 근사한 후일담을 듣고 싶어 하는 지인들에게 쉴 새 없이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별로’인 얘기들만 늘어놓았다. 떠나기 전의 나처럼 환상과 기대에 가득 차 있는 이들에게, 먼저 다녀온 사람으로서 그 이면을 알려줘야 할 것만 같은 이상한 의무감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그 무렵 수없이 쏟아져 나온 세계 여행에 대한 책과 방송들. 그리고 젊은이들은 모두 떠나야 마땅하다고 밀어내는 온갖 미디어에 나는 심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반항하는 마음으로.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의 이면


얼마 전에 태국 친구가 서울에 놀러 왔다. 구 서울역사에서 하고 있는 전시회를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다녀왔다. 나는 이런 공간이 서울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 친구는 예전 역사를 문화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내게 정말 멋지지 않냐고 동의까지 얻어냈다. 또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야 한다며 대형마트로 가더니만 김과 생리대를 잔뜩 사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에서 한국 생리대가 짱이야. 김도 최고야!.”


순간 홍삼과 막걸리를 권하려던 내 두 손은 머쓱해졌다. 아마 태국 마트에서 코코넛 오일이나 말린 망고를 사며 기뻐하는 나를 보던 그때의 친구도 비슷한 심정이지 않았을까? 태국 친구가 코코넛 오일을 왜 사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먹어도 되고 발라도 되고 너무 좋다고. 전 세계 셀러브리티들이 주목하는 품질 좋고 값싼 코코넛 오일이 태국에 이렇게나 많으니 너는 정말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태국에서 이런 코코넛 오일은 할머니들이나 먹거나 바르는데..”


뭐라고? 그때 나의 충격이란 말도 못한다. 외국인과 내국인의 시선 차이는 비단 쇼핑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등교하고 가장 늦게 하교하는 학생들이 한국의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오명이다. 그러나 그런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롤모델로 삼아 단기간에 학생들의 성적을 높이고 대학 입학률을 높여 범죄율을 낮춘 미국의 도시가 있다면, 우리는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문화를 지양해야 할 과거의 유물처럼 여기고 그에 반한 ‘슬로 라이프’를 지향하지만 이런 ‘빨리빨리’ 문화를 본받아 경제성장을 꾀하는 나라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면, 정부의 심의를 거쳐야만 영화를 상영할 수 있고 책을 출판할 수 있는 나라가 전 세계에는 아직 많고 그 나라의 꿈나무들이 해마다 한국으로 유학을 오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의 이면이지 않을까.



이면을 알되 함몰되지 말 것


내가 보는 한국도 한국이고 그들이 보는 한쿡도 한국이다. 재미있는 건 그 한국과 이 한쿡은 같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 결국 어느 면을 어떻게 보며 살아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지금 십 년째 서울에 살고 있지만 여행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한국과 한쿡만큼 다르다.


그때는 선택의 여지없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우연히 태어나 그대로 몇십 년을 쭉 살아온 로컬 피플이었다면 지금은 전 세계를 여행하다 ‘한쿡’이 좋아 장기 체류 중인 여행자라고 생각하고 살기 때문이다.더 이상 나는 세상의 이면을 끈질기게 파고들거나 보이는 게 전부인 양 떠드는 세상을 탓하지 않는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 자신뿐이다. 내가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보다 세상이 날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최선을 다한다. 내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나를 지킨다. 분노의 에너지가 일상을 망치지 않도록 중용의 마음으로 삶을 돌본다.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고 믿는다. 세상은 저마다의 가슴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니까.


한동안 여행의 뒷면, 삶의 이면에 심취하던 때를 돌아본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세상의 이면을 바닥까지 경험해 보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래야만 이후의 삶을, 지금 장기체류 중인 이 서울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나버리고만 한국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런 나라에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떠났던 내가 돌아와 너무나 잘 지내고 있는 이 에너지의 근간에는 결국 삶의 이면을 끈질기게 파고들었던 그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면이라는 것도 어느 한 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이면과 이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이면을 알되 그 이면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1140948.JPG




이 책은 ‘1년의 여행’이 그 후 돌아온 ‘10년간의 일상’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삶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여행의 기록’과 ‘일상의 기록’이 같은 테마로 교차 수록되어 있습니다.



keyword
이전 08화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여행의 로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