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로 가는 비행기에서 미리 쿠바를 만나보다.
18:50 하네다발 토론토행 에어캐나다. 도쿄 하네다공항을 뒤로하고 비행기는 제시간에 출발했다.
경유지였던 일본에서 너무 힘을 뺐던 탓일까, 아니면 원래 비행기만 타면 습관처럼 잠을 잤던 탓일까?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친구는 이런 나를 보고 이 또한 행복한 거라고 한다. 그 친구는 비행기에서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해 괴로워하곤 하니까. 얼추 한 시간쯤 잤을까 싶었을 때 기내식이 나왔다. 술 못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과감하게도 작은 레드와인 한 병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어둠 속을 헤쳐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미리 준비해온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레드와인만큼이나 붉어진 얼굴을 하고 불 꺼진 비행기 속에서 작은 휴대폰 화면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2004년에 개봉한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이다. 체 게바라의 《Diarios de motocicleta》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젊은 시절의 체 게바라가 친구와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미대륙 횡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한 과정을 담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해 콜롬비아에 이르는 약 8000km에 이르는 여정을 친구와 오토바이 한 대로 여행하며 꿈 많은 젊은 의학도였던 체 게바라(에르네스토 게바라 Ernesto Guevara, 이 이름이 체 게바라의 원래 이름이다)가 남아메리카 민중들의 삶을 가슴으로 느끼며 혁명가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쿠바의 상징, 혁명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그가 원래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며,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고, 영화 속에 펼쳐진 평범한 이들의 삶이 과연 남미만의 문제일까, 젊은 시절의 나는, 우리는 과연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을까, 아니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하기는 했을까... 여러 생각들이 어두운 밤하늘 속에서 비행기 엔진 소음마냥 소란스레 떠다녔다. 며칠 뒤 만날 그의 흔적에서 나는 무엇을 느끼게 될까...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새로운 태양의 빛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영화도 봤는데 이제 겨우 비행시간 5시간. 아직도 7시간이 남았고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다가 날짜 경계선을 넘었다. 시간의 역주행!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개념을 가뿐하게 무시하고 비행기는 시간을 역주행하고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역주행을 하며 흐르고 있었고 비행기가 북극 가까운 곳을 넘어가는 어느 즈음 창밖에 해가 곧 떠오를 듯이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보통의 일출 모습 그대로. 그런데 비행기가 북극 쪽으로 더 가까워져서 그랬을까? 다시 날이 어두컴컴해지더니 다시 어느 순간 구름 저편 어디선가 해가, 여명도 없이 해가, 아무런 예고 없이 검붉어 짙은 보랏빛 같은 해가 구름을 헤치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옆에 앉았던 직진님과 그 장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새카만 밤, 구름마저 빛이 없어 새카맣게 보이던 그 위로 짙은 붉은 색의 해가 덜렁 떠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가 뿜어내는 빛의 색이 바뀌더니 점차 푸른 빛깔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영하 50도 밑을 넘나다는 비행기 밖의 서느런 기온을 담아내듯이 태양은 그렇게 푸른 빛을 뿜어내었다. 푸른 빛을 받아 푸르게 반사된 구름이 이곳이 지구임을 알려줄 뿐 마치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카메라를 아무리 조작해도 그 빛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었다. 이럴 때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 하더라도 사람의 눈에 비치는 그 모습을 담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었다. 난생 처음 겪는 장관에 직진님도 나도 그저 작은 비행기 창문 밖을 응시하며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었다. 개념적인 시간과는 별개로 푸른 해가 떠오르는 신비한 체험에 점점 빠져들어 급기야 두 사람은 말도 잃고 넋도 잃고 그 풍경에 빠져들어 갔다.
토론토 공항을 잠시 스쳐 아바나 공항을 향해~
그렇게 어슴푸레한 하늘은 오대호가 가까워지면서 밝아졌고 비행기는 토론토공항을 눈 앞에 두기에 이르렀다. 하얀 눈이 도시를 뒤덮은 토론토의 풍경이 창밖으로 보였고 무사히 공항에 안착했다. 현지시간 16시 30분. 비행기에서 내려 환승하러 게이트를 찾아 이동했다. 환승게이트는 E72. 그 앞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했다. 대박님과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하는데 귀가 먹먹하다며 크게 코를 풀던 대박님이 갑자기 코피가 터지고 말았다. 기압 차이 때문에 그랬으리라. 황급히 수습을 하고 되돌아오는데 방송이 어렴풋이 들렸다. 우리가 탈 아바나행 비행기의 탑승게이트가 바뀌었다는 내용이었다. 전광판을 확인해보니 정말 바뀌었다.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이 사실을 알렸다. 잠시 공항을 둘러보러 갔던 일행들이 모두 도착하고 나서 부랴부랴 다시 게이트를 옮겨 갔다. E80게이트에 도착해서 탑승 안내 직원에게 비행기표를 보여주고 물었더니 이곳이 맞다고 했다. 그냥 멍하니 E72게이트 앞만 지키고 있다가 환승편을 놓칠 뻔했다. 가이드나 인솔자 없이 다니는 여행의 묘미라면 한바탕 시끌벅적하게 웃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방송이 나오더니 이번에 연착이란다... 나참...
해가 지고 있는 토론토 공항의 여유로운 모습. 우리 일행과는 딴판이었다. 18시 30분이 넘어서 아바나행 비행기는 출발했다. 원래보다 20~30분쯤 늦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출발하고 비행기가 고도를 많이 올리기도 전에 기장은 비행기의 방향을 바꾸고 격하게 턴을 하기 시작하더니 과속(?)을 하는 것 같았다. 뭐 어쨌든 늦었으니 그 시간을 만회하는 것이리라. 좌석 앞 작은 화면에 표시되는 도착 예정시간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우리의 배고픔도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향긋한 음식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총무님의 말에 의하면 이 비행기에서는 기내식이 없다고 여행사에서 알려줬다고 했다. 하지만 도쿄 갈 때도 없다고 했던 기내식이 나오지 않았나? 그리고 지금 향긋한 음식 향이 온 비행기 안을 감싸고 있지 않은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계속 냄새만 나고 승무원은 보이질 않았다. 그러더니 간단한 샌드위치 등을 실은 카트와 함께 승무원이 나타났는데... 이런이런... 이것은 기내 카페였다. 한 마디로 사 먹으라는 것이다. 알고 봤더니 앞에 앉은 비즈니스 클래스에만 기내식이 나오고 이코노미는 간단한 스낵 정도를, 그것도 사 먹으라는 것이었다. 여행사의 말이 틀릴 때마다 좋은 쪽으로 틀리더니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맛있는 냄새로만 배를 채워야 했다. 3시간 여를 날아 아바나 상공까지 왔다. 그런데 화면에 나타나는 항로 궤적이 이상했다. 무언가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알아듣지는 못했고 비행기는 아바나 상공에서 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 이제 내리나 했더니 또 돈다. 빙빙빙~ 처음 가보는 아바나의 야경을 구경시켜주나보다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창 밖을 내다 보았다. 하늘에서 본 아바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큰 도시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렇듯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며 깊어져 가는 밤을 밝히고 있었다. 비행기는 아바나 하늘을 그렇게 세 바퀴를 돌더니 공항 활주로에 무사히 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앞서 내린 비행기가 착륙하는 과정에 시스템이 다운되었었다고 했다. 시간은 22:30~! 원래 예정시간보다 40분 정도가 늦었다. 늦게 출발한 시간을 만회하려던 비행기 기장의 노력도 그렇게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쿠바 여행의 시작이다. 느긋해야 한다~!
비행기에서 내려 수하물 벨트로 갔다. 짐을 찾고 나가서야 만날 줄 알았던 현지 가이드가 이미 그곳에 나와 있었다. 가이드가 어떻게 공항 안으로 들어올 수 있나 싶었다. 우리 공항, 아니 대부분의 공항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시가를 입에 물고 피우고 있었으니... 이건 뭐 도저히 일반적인 공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여튼 '필리페'라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쿠바인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한국말을 너무너무 잘했다. 뜻밖의 일이 연속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예전에 북한대사관에서도 근무했었고 한국에도 몇 번 갔었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짐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수하물 벨트가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여기서부터 우린 적응해야 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이 동네는 서두르는 법이 없고 느긋하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짜증내는 사람도 없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빨리빨리에 너무 익숙해져서 살고 있던 우리에겐 다른 방식의 적응이 필요했던 것이다. 수하물은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다 찾을 수 있었다. 직진님, 도사님과 총무님은 앞으로의 일정과 이동 등에 대한 준비와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산타끌라라와 뜨리니다드를 다녀오는 일정과 이동수단에 대한 고민이 컸다. 수하물이 나오기 전까지 필리페와 이와 관련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짐은 다 찾고 준비되어 있던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거의 12시가 다 되었다. 우리가 아바나에서 묵을 이 숙소는 꽤 괜찮았다. 사진으로 보던 아바나의 원 도심에서는 잘 보기 힘든 깔끔한 건물에 내부도 나름 세련된 모습이었다.
쿠바에서 처음 만난 숙소. 꽤 괜찮은 호텔이었다. 우리는 기나긴 비행과 이동에 지쳐 방 배정이 끝나고 바로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집행부(직진님, 도사님, 총무님)의 방에서 잠깐 요기를 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멀고 긴 쿠바까지의 여정을 이렇게 마무리 했다.
서울 집에서 나와 아바나의 호텔까지 장장 31시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그 31시간 동안 참 재미있는 사건과 일정들이 들어있었다. 이야깃거리도 참 많이 만들었고... 자유여행의 묘미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가이드의 안내(개인적으로는 통제라고 생각하지만...)에 따라 정해진 곳만을 전세버스로 이동하는 여행이 아니라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상황에 따라 일정을 바꾸고 새로 만들기도 하고 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래봐야 이제 이 여정의 시작일 뿐~ 기대가 많이 되는 시작점이었다.
하여튼 그래도 시간은 여전히 1월 22일 밤. 31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1월 22일! 웃음이 픽 나왔다. 멀기도 멀지만... 시간이라는 것이 참... 시간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만들어 둔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장거리 여행에서 이렇게 실감이 되었다.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쿠바여행이 시작된다는 기대감을 안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