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든든히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패키기 여행이라면 버스를 타고 이동하겠지만 우리끼리의 자유여행이므로 걷기 시작했다. 그린마켓스퀘어 한쪽으로 난 작은 골목을 통해 직진님과 도사님이 길잡이를 하며 선두를 이끌었고 나머지 일행들은 그 뒤를 따랐다. 굿호프성(Castle of Good Hope)을 향한 길이다. 10여분을 걸었고 그 길을 걷던 중 익숙한 이의 동상이 2층 난간에서 아래를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넬슨 만델라의 동상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걷다가 넬슨 만델라를 만났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우리가 사전에 알지 못했던 동상을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역시 걸으며 만나는 여행의 묘미가 이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층 난간에서 손을 들어 아래를 향해 미소 짓는 만델라의 동상이 있는 이 건물은 케이프타운 시청 건물이었다. 건물 아래서 위의 동상을 향해 사진을 찍으며 소란(?)을 피우는 우리 일행을 보고, 시청 청원경찰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부로 들어와서 구경해도 된다고 안내를 해주었다. 이건 또 무슨 행운이람? "땡큐"를 연신 외치며 안내에 따라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에 올라 보니 만델라는 시청 앞 광장을 향해 손을 내밀어 그 앞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동상이 거대하지도 않았고 그저 원래 만델라의 체형 정도로 만들어 그의 정신을 왜곡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1990년 넬슨 만델라가 로빈아일랜드에서 오랜 징역 생활 끝에 석방되어 나와 이곳 시청사 발코니에서 처음으로 공개 연설을 했다고 하는데 딱 그 자리에 딱 그 모습으로 동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시청사 발코니에서 연설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2층 발코니에서 만델라는 광장을 향해 손을 흔들며 온화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우리 일행들도 사진을 남겨보기로 했다. 만델라의 손짓을 따라하기도 하고 그에게 안겨보기도 하면서 즐겁게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그리고 바로 만델라의 그 눈빛과 손짓이 닿는 그 광장으로 가보았다. 사실 광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주차장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주차구획선이 많이 그려져 있었고 일부 주차된 차들도 있었다. 인도와 가까운 광장 가장자리로는 각종 노점상들이 천막을 쳐놓고 여러 가지 잡화를 팔고 있었다. 대부분 흑인들이었다. 어제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인종차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기에는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점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케이프타운 시청사 건물. 100년도 더 된 르네상스식 건물이 푸른 하늘과 만나 고풍스러운 멋을 뽐내고 있었다.
광장 가운데쯤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시청 건물이 오롯이 보였다. 꽤나 그럴듯한 건물이었다. 5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05년 완공된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중앙 첨탑에는 큰 시계가 있고 종도 울린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에서 미술 전시회나 콘서트 등 문화행사가 많이 열린다고 한다. 근사한 건물 뒤로 보이는 테이블마운틴의 모습이 또한 장관이었다. 여전히 정상 부근에는 하얀 구름이 식탁보처럼 걸쳐져 있었고 그곳을 비바람을 뚫고 오전에 갔다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광장에서 바라본 테이블마운틴. 아침보다는 많이 걷혔지만 여전히 솜털같은 식탁보가 평평한 정상부근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광장을 가로질러 그 끝에서 조금만 걸으면 굿호프성(Castle of Good Hope)이 나타난다. 1679년에 완공된 이 성은 남아프리카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식민시대의 건물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군사 요새로 지어지고 별다른 침략을 받은 역사가 없어 그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지상에서의 시선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미국의 펜타곤처럼 오각형의 모습을 한 건물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으로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일부에서는 해자도 있다고 한다. 이 성은 원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물류 수송과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가 남아공을 번갈아 점령하면서 각 나라의 군사 요새로 쓰이다가 남아공의 독립과 함께 정치와 군사 중심지로 쓰였었다고 한다.
굿호프성의 파노라마 사진. 성은 군사 요새의 면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성 입구에 있는 안내문들.
외부 지역은 무료로 개방되고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안내문에 상세히 시간과 요금이 적혀있다. 내부에는 과거 총독이 썼던 건물도 있고 군사박물관도 있다고 하지만 사전에 조사한 정보를 보면 그다지 관람하기에 훌륭한 전시물은 없다고 했다. 정문을 찾아 갔더니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안 그래도 망설이던 차에 철문 안으로 한번 쓰윽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내부 관람은 포기하기로 했다. 200여 년간 남아공의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로 쓰였던 만큼 잘 정비되어 있는 모습을 보였다. 현재는 남아공 국방부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하는데 군인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굿호프 성의 정문. 웬일인지 굳게 철문이 닫혀 있어 아쉬웠다.(왼쪽) 철문 사이로 본 성 내부의 모습(오른쪽).
성 입구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오랜 식민 역사, 침략의 역사 속에서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성이라고 하기에는 주변 풍광과 성은 절묘하게 어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의 뒤로 보이는 테이블마운틴의 높고 평평한 산세는 마치 또 하나의 성벽처럼 굳건히 이 성과 케이프타운을 지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그 옛날 이곳을 탐하던 유럽인들의 길잡이였던 저 산과 유사한 모습으로 성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만큼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파아란 하늘과 하이얀 구름의 조화에 하나의 아름답고 훌륭한 풍광을 자랑하는 듯하여 무언가 아이러니한 느낌마저 들었다. 눈을 돌리며 찬찬히 둘러보다가 만난 거대한 옛날 식 포 하나가 이곳이 군사지역이었음을 불현듯 일깨워주었다.
커다란 포가 단단한 성벽과 어울리며 이곳이 군사요새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멀리보이는 테이블마운틴마저 요새처럼 느끼게 했다.
역사는 그렇게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는 것이고 무언가 아름답지만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발견한 감독님의 흑백 사진이 그런 느낌을 잘 담아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사진은 촬영 감독님의 감성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ㅠㅠ
촬영 감독님의 작품. 묵직하고 씁쓸한 느낌의 사진이다.
1월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여름이다. 시간은 햇살이 가장 따가운 오후 두어 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그 더위를 뚫고 우리 일행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굿호프 성을 나와 도로를 건너 약 10분쯤 걸으면 디스트릭트 식스 박물관(District 6 Museum)이 나온다. 잘 정돈된 시가지의 길을 걷다 보면 꽤 괜찮아 보이는 건물들 사이에서 불쑥 안내 간판이 등장한다.
디스트릭트 식스 박물관(District 6 Museum)의 외관.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을 지나 걷다보면 불현듯 나타난다.
입장권을 사고 안으로 들어가니 사실 무엇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가웠다. 더운 여름 날씨에 바깥에서 계속 돌아다닌 터라 땀도 좀 났고 꽤나 더웠기 때문에 우선 중앙홀 주변에 있는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더위를 조금 식히고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에는 직접 손으로 그린 듯한 느낌의 거대한 지도가 있었고 거기에 거리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주변으로는 실제 그 거리의 이름을 나타내는 표지판들로 만든 탑 같은 조형물과 마치 롤링페이퍼처럼 손으로 쓴 대형 천막, 각종 휘장들이 새겨진 플래카드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벽에는 여러 사진과 안내글들이 붙어 있었다.
이층에서 내려다본 중앙홀의 모습.
입구 맞은편에는 거리명을 나타내는 표지판들로 만든 탑과 각종 휘장이 담긴 현수막을 전시해 놓았다.
이 디스트릭트 식스 박물관(District 6 Museum)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강제 철거당했던 옛 다문화 공동체인 디스트릭트 식스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1876년 직공, 이민자, 해방된 노예, 상인들로 구성된 다문화 공동체가 100년 가까이 이곳에서 꽤 번성한 주거 지역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1966년 국민당이 이 주거지구를 백인 전용 지역으로 선언하면서 6만 명이 넘는 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집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자신들이 살던 터전이 재개발되는 것을 끝까지 막아서며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 강제 철거되는 모습 등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에 박물관을 만들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1966년 강제 철거 당시의 사진과 사연들을 전시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몇몇 개의 부스로 나뉘어 당시 주민들의 살았던 집과 이발소, 서점 등을 재현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들이 예전 모습대로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 언뜻 보면 우리의 1960~70년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다만 다른 점은 1988년 '디스트릭트 식스에 손대지 말라'는 주제의 컨퍼런스가 개최되고 이듬해 박물관 재단이 설립이 되었고, 오래된 감리교 선교교회 안에 그 당시를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정성이 모여 이 박물관을 1994년에 완공하여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앞서 얘기한 바닥의 그 지도는 실제 이곳에 살았던 주민들이 직접 자신의 집 위치를 표시한 특별한 지도이다. 그리고 하루에 4회 정도 전시 해설이 있는데 그 해설을 실제 이곳 거주민 출신들이 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다. 이곳 출신 사람들은 해설을 통해 생생한 증언들을 남길 수 있고 이 박물관을 통해 이 지역의 발전을 위한 환경 개선, 문화 다양성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반적인 시민의식도 달라지겠지만, 우리 역시 강제 철거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왜 이런 공간과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내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컸다. 케이프타운의 인종 차별 정책에 따라 탄생한 이 박물관을 보며 안타깝고 안쓰러운 역사라고 느껴지기보다 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숨기려고만 하고 기억하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중앙홀을 가로질러 작은 문을 지나면 The Memorial Park라고 적힌 작은 공간이 또 나타난다. 그곳에 퍼질러 앉아 이 생각, 저 생각... 파편처럼 떠다니는 생각들을 마음껏 어질러보았다. 쉽게 정리되기 쉬운 주제들이 아니었다. 다크 투어의 짙은 무거움이 마음을 짓누르는 듯했다. 그저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그런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가득 차 있었다. 고마웠다.
인종차별 정책과 강제철거의 역사가 짙게 묻어있는 디스트릭트 식스 박물관을 뒤로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을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노예숙소(Slave Lodge)가 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관공서들이 많은 지역의 작은 길을 걷다 보면 오래지 않아 노예숙소가 나온다.
노예숙소의 뒷면. 중앙에 보이는 후문은 열리지 않았다.
노예숙소임을 알리는 꽤나 큰 광고판이 출입구 양 옆으로 붙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름과 달리 꽤나 번듯하고 잘 꾸며진, 잘 정비된, 뭐 그런 외관이 눈 앞에 딱 펼쳐진 것이었다. 의구심이 들었다. 문을 당겨 열어보려 했더니 열리지 않았다. 휴관인가 싶었는데 혹시나 싶어 건물을 끼고 한 바퀴 빙 돌아보니 건물의 정면 부분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건물 뒷면을 먼저 만난 것이었고 잠겨있던 그 문은 후문이었던 것이었다. 정면 부분은 또 다른 정비를 위해 공사 중이었다.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공사를 위한 비계와 여러 장비들 사이로 "SLAVE LODGE"라는 표시가 보이는데 무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얀 스뮈츠의 동상이 서 있었다. 남아공에서는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한때 남아프리카 연방의 수상을 지내기도 했고, 1,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군 육군 원수로 영국군을 이끌기도 했으며, 지금의 UN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흑백분리 정책의 폐기를 지지하기도 하였고 그럼에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실행되자 크게 낙심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 인물의 동상이 이곳에 서 있는 것도 어딘가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었다.
공사중인 노예숙소의 정면부. 정문 옆에는 얀 크리스티안 스뮈츠(Jan Christiaan Smuts )의 동상이 버티고 서 있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니 일단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큰 로비가 우리를 맞이했다. 역시 노예 숙소라는 이름과는 영 부조화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구심은 조만간 풀렸다. 이 건물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탓이었다. 자료집을 기껏 만들어놓고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괜찮았다. 오히려 더 낫다 싶기도 했다. 그냥 배경지식을 통해 머리로 이해하며 '아하~' 하는 것보다 모르고 있다가 의구심을 갖거나 충격을 받은 후에 '아하!!'하고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기가 막힌 자기 합리화이긴 하지만~ ㅎㅎ
노예 숙소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중앙 홀. 간략한 안내가 홀을 둘러가며 전시되어 있다.
노예 숙소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우리가 자체 제작한 자료집에도 넣어놓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노예 숙소(slave lodge) - 케이프 식민지의 초기 정착민들은 농장과 건설 작업에서 일을 시키고 하인으로 부릴 노동력이 부족해 애를 먹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지역 아프리카인(네덜란드인들은 '호텐토트'라 불렀다)들을 징발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으므로, 노예들은 노예 제도가 용인되어 있었던 네덜란드 제국의 다른 식민지와 아프리카의 다른 장소에서 수입되어 왔다. 최초의 '화물'은 1650년대에 도착했으며, 향후 150년간 동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에서 사들인 6만 명 이상의 노예들이 식민지로 실려 왔다. '노예 숙소'는 그 길고도 이상한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개조되었다. 1679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케이프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며 원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회사 소유의 노예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창문이 없는 벽돌 건물로, 주거 환경은 완전히 불결하고 비참했다. 1770년대에는 거의 천 명에 가까운 노예들이 이곳에 살았으며 한때 이곳은 식민지의 중심적인 매음굴이기도 했다. 거주자들 중 일부는 숙소 맞은편에 있는 병원에서 일했다. 1806년 영국인들이 케이프 식민지를 차지하게 되자, 그들은 건물을 정부 청사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그 무렵에는 약 300명 가량의 노예들이 숙소 안에서 살고 있었는데, 대다수는 나이 든 이들이었다. 1828년에 여전히 일할 수 있는 노예들은 경매에서 팔리고, 나머지는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해방되었다. 노예제 폐지 법안에 따라 대영 제국의 모든 노예들이 자유를 찾게 되자, 1830년대에 노예 제도는 완전히 철폐되었다. '노예 숙소'는 여러 해 동안 대법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966년 이 건물은 문화사 박물관이 되었다. 1998년 이곳은 개칭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역사의 일부로서 노예 제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박물관 뒤편의 스핀 거리에 달린 현판은 노예들이 사고 팔리던 장소를 나타낸다.
- [네이버 지식백과] 노예 숙소 [Slave Lodge]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리처드 카벤디쉬, 코이치로 마츠무라, 김희진)
노예 숙소가 그간 변모해온 모습을 정리해 놓은 전시물.
노예 숙소가 그간 관공서나 대법원 등의 용도로 쓰이며 지금처럼 근사한 모습으로 변모했던 것이었고,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꽤 괜찮은 로비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예전의 그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고자 이곳을 박물관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나름의 용기있는 모습이라고 생각되었다.
천천히 내부 전시실을 둘러보기로 했다. 노예 무역이 성행하던 시기,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고 물건으로 인식했던 그 당시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있었다. 배의 한 층에 어마어마한 사람을 빽빽이 싣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돌아누울 수 있는 공간조차도 확보되지 않은 채로 노예들은 세계 각지에서 화물로 실려왔고 실려갔던 것이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조차... 그러니 기록에 의하면 1653년 최초의 노예가 도입했을 당시 250명으로 출발했던 숫자가 도착할 때는 살아남은 사람이 170명으로 줄었다고 하니 얼마나 참혹하고 처참한 환경이었는지 가늠할 수가 있겠다.
배 한 층에 저렇게 사람을 싣고 갔다고 한다. 사람을 태운 게 아니라 화물을 실은 듯한 모습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이동 중에 복도 끝에 작은 창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는 모두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작은 창문 하나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이 너무 아름다워 일행 중 몇 명과 빛을 이용한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사실 예전에 여기에 수용되었던 노예들에게 그 빛이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처음 이 건물이 지어졌을 때에는 내부에는 전혀 빛이 통하지 않게 창문이 없었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이런 조각 빛이라도 그 소중함이 무척이나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 숙소의 전시공간을 이동하다가 만난 창문 한 조각. 어두운 실내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진 전시관을 거의 다 보고 나올 즈음 아래 사진과 같은 공간이 나왔다. 액자에 걸린 몇몇 사람들의 사진과 함께 그들의 목소리와 어딘가 구슬픈 곡조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예 숙소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노예 출신의 사람들의 구슬픈 음악이 공간에 메아리 친다.
저 의자에 앉아 있으면 노예 출신인 사람들의 목소리와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다소 어둡고 텅 빈 공간에 몇 사람의 사진 액자만 걸린 이곳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언가 묵직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와 목소리가 이 공간을 떠도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는 말이 있다.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그때의 잔혹했던 참상을 직접 느껴보며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여행을 뜻하는 말이다. 내 고향 제주도에도 다크 투어가 있다. 제주 4.3의 아픔을 간직한 유적과 유물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그날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아픔이 모두 지난 그곳들의 지금 현재는 그렇게 또 아름다울 수가 없다. 어쩌면 그 기가 막히고 말도 안되는 대비를 통해 그 아픔을 더욱 깊게 보여주려는 신의 뜻은 아닐는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아름다운 곳! 그 이면에 그런 아픔들이 그곳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다. 우리에게는 낯선 종류의 아픔이지만 그 아픔의 무거움은 충분히 느껴질 수 있는 투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