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에서 넬슨 만델라를 만나고, 식민 시절의 상징인 굿호프 성을 지나, 인종 갈등 속에 약자들의 아픔을 담은 디스트릭트6 박물관을 거쳐, 다시 화물 취급을 받던 노예들의 참혹함이 담긴 노예 숙소를 돌아보며 마음이 많이 무거워졌다. 이제 조금 분위기를 바꿔보려 집의 벽들을 알록달록한 색깔로 칠한 보카프 마을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늘 그렇지만 걷는 길에는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여러 변수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선 노예 숙소를 나와 골목길을 거쳐 큰길로 나오려는데, 골목길 옆으로 꽤나 규모가 있어 보이는 공원 비슷한 것이 보여 그 안으로 우리 일행들의 발걸음이 빨려 들어갔다. 얼마 후 만난 안내판에는 The Company's Garden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공원 진입로 양 옆으로는 오래된 나무들이 신선함을 더해주고 있었고 일부 노점상들이 기념품이나 아이들이 좋아할 물건들을 진열해놓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젊은 친구들은 버스킹 공연도 하고 있었다. 다크 투어를 마치고 무거워진 마음이 조금은 상쾌해지고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사이로 유럽풍의 건물들이 꽤 웅장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었다. 이 공원 한쪽으로 주요 관공서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곳이 도심임을 증명해주는 모습이었다. 도심 한가운데에 이런 가든이 있다는 것은 역시 도시에서 숨을 쉴 만한 공간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 The Company's Garden를 검색하면 또 어떤 역사적 사연들이 등장할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혹 침탈의 사연이 담긴 식민지 역사가 나타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검색을 하지는 않았다. 초록빛으로, 나무 그늘로 위안을 받던 마음을 또 무겁게 하긴 싫었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우연히 만난 공원 The Company's Garden
공원 한 옆으로 늘어서 있는 유럽풍의 건물들. 주요 관공서가 이 가든 옆으로 줄지어 서 있다.
공원 구경을 마치고 큰길로 나섰다. 보카프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길 옆으로 큰 성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역사가 꽤 되어 보이고 규모 또한 큰 편이어서 무작정 둘러보기로 했다. 앞서 걸어간 일행들은 이미 입구에서 기념사진들을 찍고 있었고 직진 성향을 지닌 몇몇 일행들은 성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쿠바 여행에서도 그랬지만 성당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지나는 길에 현지 사람들의 신앙과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어 계획하지 않았던 여행지여도 그냥 한 번씩 들어가 보곤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가 둘러본 성당은 걸어 다니는 자유여행자들에게 무언가 진한 여운을 남겨주곤 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주저없이 들어가 보았다.
세인트 조지 대성당의 입구. 대로변에 맞닿아 있어 쉽게 눈에 띈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바깥에서 본 것보다 성당의 모습은 더욱 웅장했다. 교회의 엄숙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높은 아치형의 미사 공간과 그 끝이 제단과 양 옆으로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맑은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조명을 켜지 않았지만 양 옆에 있는 세로로 된 긴 창들을 통해 빛들이 들어와서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성당의 내부. 규모도 컸고 엄숙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제단 맞은편 뒤쪽에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는 안내판이 부착되어 있었다.'세인트 조지 대성당(Cathedral Church of St. George)'이었다. 곧바로 검색을 해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곳을 정말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잘 찾아왔을까 하는 감탄을 했다. 이 성당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대표하는 데스몬드 투투(Desmond Mpilo Tutu) 대주교의 숨결이 담겨있는 성당이었던 것이다. 그는 1978년 흑인으로 처음 남아공교회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선출됐고 198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2년 뒤에는 흑인 최초 케이프타운 교구 대주교가 됐다. 투투 대주교가 1986년부터 10년 동안 인종차별에 맞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 이 세인트 조지 대성당은 '피플(people) 대성당'으로 불릴 정도로 노조 등 아파르트헤이트 투쟁 세력의 정신적 후원 기지 역할을 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투투 대주교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비폭력으로 맞섰고 흑백 인종 간의 화해를 강조해왔다. 그는 평생을 성 소수자 권리와 교육 평등권 운동 등을 강하게 지지해 왔다고 했다. 이뿐만 아니라 투투 대주교는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첫 보편 선거로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뒤에는 복수가 아닌 화해를 역설했고, 흑인 정권의 장기 집권 중 부패 의혹이 제기되자 강력히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가 있는 성당을 우리는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고 그 역사적 현장을 둘러보게 된 것이었다. 무심히 성당의 겉모습만을 보고 신앙의 위대함을 잘 표현했구나라고 감탄하며 지나친 성당이었는데 이런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의미가 있을 줄이야... 역시 여행의 대법칙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성당의 연혁을 적은 안내판과 자연광을 배경으로 영롱히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오고 몇 해가 지나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올해 초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대통령 선거 뉴스로 도배되고 있는 그 즈음, 신문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기사가 났다. 투투 대주교가 2021년 12월 26일, 성탄절 바로 그 다음날 90세를 일기로 선종했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은 2022년 1월 1일 바로 이 성당 '세인트 조지 대성당'에서 엄수되었다는 것이었다. 장례식은 공식 1급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장례 미사 전까지 일주일 간의 애도 기간이 있었고 세인트 조지 대성당에선 매일 정오 10분 간 종이 울려 퍼졌다고 했다. 그만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에게 이 성당과 투투 대주교의 의미는 무척이나 소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권 운동의 상징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고(故) 데스몬드 투투 명예 대주교. 그의 의미 있던 삶의 행적들로 더욱 큰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성당, 세인트 조지 대성당. 역사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흔적은 세월을 뛰어넘는 유적에 남게 되는 것인가 싶었다.
세인트 조지 대성당을 뒤로하고 약 10분 여를 걸어 우리의 목적지 보카프(Bo-Kaap) 마을에 도착했다. 사전 조사를 하고 자료집을 만들며 보았던 그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에 이곳이 보카프 마을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시그널 힐(Signal Hill)을 향해 난 오르막길 양 옆으로 원색을 담은 집들이 이웃집과 딱 붙어 그 길의 끝까지 펼쳐져 있었고 우리들의 시선은 온통 그 풍경에 꽂힐 수밖에 없었다. 따로따로 보자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원색들이 절묘하게 조합되면서 나름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했다. 보카프 마을은원래 이민자들의 마을이었다. 말레이 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무슬림 사원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며 점차 이곳은 말레이 족의 집단 거주지로 인정받았고 그들만의 문화와 생활을 이곳에서 꽃피워갔다. 특히 아파르트헤이트 기간 동안에는 그룹지역법에 따라 정부로부터 완전하게 집단 거주촌으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이곳에는 가장 먼저 정착한 이민족의 마을답게 예전의 건축물과 건축양식이 남아 있고 가장 오래된 건물은 현재 보카프 박물관으로도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건물의 색을 알록달록 칠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명소가 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겪고 있다고도 한다... 뭔가 씁쓸해지는 느낌이기도 했다.
언덕을 마주하는 경사면에 알록달록한 집들이 맞붙어 어깨를 잇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백인 여행자들도 꽤 많이 보였다. 우리 일행들 역시 그들처럼 알록달록함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마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리를 쉴 겸 길 옆 비탈에 우리 일행이 쪼로록 한 줄로 앉아 쉬는데 현지인들과 다른 여행자들이 그런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했고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한바탕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작은 미술관, 작은 공예품 가게 등도 있었고,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마트도 보였다. 알록달록한 겉면 뒤에는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 있었다. 문 앞에 나와 이웃과 얘기하는 사람들부터 물건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파는 청년 등 평범한 일상이 있었다.
주도로 옆 골목으로도 알록달록 집들은 이어져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곳은 마을이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의 일상생활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마을에서 그런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어느 순간 보니 직진님을 포함해 몇이 보이질 않았다. 알고 보니 마을 뒤 쪽 언덕을 향해 갔다는 것이었다. 역시 우리 직진님은 봉우리만 보이면 참지를 못한다. 소리 소문 없이 그 뒷산을 향해 직진한 것이었다. 나중에 돌아와서 얘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올라갈 만한 이유가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보카프 마을의 전경이 쫘악 펼쳐지는 것은 물론 마을 뒤로 멀리 테이블마운틴이 펼쳐져 있어 그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데 정말 공감이 갔다. 앞에는 나무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마을 풍경이, 중간에는 도심의 높은 빌딩들이, 그리고 저 멀리에는 오전에 올라갔던 그 하얀 솜이불이 덮인 테이블마운틴이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미처 언덕에 오르지 못한 작가님은 직진님이 사진 찍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길 한가운데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ㅋㅋㅋㅋ.
이제 길었던 하루가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준비해서 테이블마운틴을 다녀오고 그린마켓에서 벼룩시장도 구경했고 식민의 역사, 노예의 역사를 탐방하는 다크투어도 했다. 보카프 마을을 끝으로 오늘 하루 예정되었던 여정은 마무리되었다. 내일은 식물원과 펭귄 해변, 희망봉을 다녀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렌터카를 알아보기로 했다. 휴대폰 검색을 통해 그나마 큰 렌터카 업체를 찾았고 걸어가 보기로 했다. 보카프 마을의 한 골목을 통해 길잡이가 시작되었다. 걸어 갈수록 집들의 색도 원색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렌터카업체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워낙 빠른 직진님의 걸음걸이 탓에 뒤에 있는 일행들은 헉헉 대며 걷다가 기어이 뒤처지기도 했다. 길게 늘어져 선두도 끝도 잘 안 보이는 채로 업체를 찾아갔다. 날이 더워 땀이 났고 건물 안에 먼저 들어간 일행들이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길래 터벅터벅 들어갔다. 일행들이 그렇게 바삐 손짓한 이유가 있었다. 시원했다~!! 에어컨이 너무나도 시원하게 우리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몇몇이 상담을 하는 동안 나머지는 로비 한쪽에 있는 의자들을 모두 차지하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렌터카 회사 로비 한옆으로 고객을 위한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시원함에 일어서기가 싫었다.
그런데 얘기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장 내일 사용할 차량을 예약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보험료였다. 보험료가 차값보다 더 비싼,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도 비싼 보험료가 우리를 계속 주저하게 만들었다. 기본 보험료는 크게 문제 될 수준은 아니었는데 완벽하게 보장되는 보험으로 업그레이드를 하라는데 그 보험료가 너무 비쌌던 것이었다(이 보험료 문제는 나중에 나미비아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얘기하고 우리끼리 토론하고 한 끝에 결국 그냥 나왔다. 시원하게 피서만 하고 나온 셈이었다. 내일은 우버택시가 잘 되어 있으니 그것으로 해보자고 결론을 낸 것이었다. 비용적인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을 듯하고 오히려 기사들이 길을 잘 알고 있으니 더 편할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이제 얘기해 본들 무슨 소용이랴. 우리는 렌터카 업체를 나와 우버 택시를 불러 나눠 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은 다시 식당들이 많이 모여있는 워터프론트 지역으로 갔다. 하루 종일 많이 걸어 체력 소진이 많은 만큼 오늘은 꼭 비싸고 좋은 걸 먹어야겠다는 열혈 요청들이 있어 고기를 먹으러 갔다. 각종 고기가 모둠으로 구워져 나왔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다만..... 금세 고기에 질렸다. 역시 한국인은 쌈이랑 같이 먹어야 하나보다. 느끼함이 뱃속 전체를 휘감는 느낌에 그다지 많이 먹지는 못했다.
바비큐 세트로 나온 고기. 맛은 있었으나 쌈을 싸서 먹는 우리 입맛 탓에 많이 먹지는 못했다.
워터프론트의 일몰. 깨끗한 하늘과 맑은 구름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해가 넘어가는 워터프론트의 풍경은 이날도 참 좋았다. 미세먼지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하늘과 뭉게뭉게 떠 있는 흰 구름이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태양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저녁을 마치고 내일 일정에, 사실은 오늘 밤에 필요한 음료(?)와 신선한 과일 등을 사기 위해 몇은 장을 본 후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기로 했고, 나머지는 소화도 시킬 겸 걸어서 숙소까지 가기로 했다. 나와 총무님, 작가님, 선비님은 워터프론트 대형 마트에서 물과 과일, 맥주 등을 사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갔다. 일행과 헤어진 지 약 1시간쯤 뒤였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우리 넷보다 먼저 숙소에 도착했어야 할 나머지 여섯 명 중 아무도 숙소에 없었다. 숙소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하필이면 숙소 키를 갖고 있는 사람이 우리 넷 중에는 없었다. 우리 숙소인 아파트 3개 호실의 키가 모두 먼저 헤어진 여섯 명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걸어오면서 이곳저곳 둘러보며 사진 찍느라 늦나 보다 했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면 모두 도착했어야 하는데... 무슨 일이 있나... 하며 슬슬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고 몇 번 연락을 했는데 그저 오고 있다고만 하니 어찌 된 일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아무리 여름이지만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그들을 기다리는 건 힘들었다.
얼마 뒤 그들이 돌아왔다. 다소 미안한 표정과 다소 상기된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그때서야 진실을 말했다. 장보기 팀 4명을 뺀 나머지 여섯은 해가 떨어져 가는 이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어 직진님의 주동 아래(그랬다. 직진님은 어딜 가든 일출과 일몰을 꼭 봐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갑자기 우버 택시를 불러 타고 케이프타운의 유명 일몰 포인트인 시그널 힐로 갔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일몰을 즐기고 있었고, 장보기 팀에서 연락이 오자 어쩔 줄 몰라 "가고 있다"는 말만 연신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일몰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불편한 마음이 가슴 한 구석을 누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시그널 힐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남아공 월드컵의 주경기장이 보인다.
그들이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았다. 아니었다. 불편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신나게 일몰을 즐기며 심지어 점프샷까지 찍어가며 재미있게 놀다 온 모습이 고스란히 사진에 남았다. 심지어 동영상 촬영에 담긴 영상을 보니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 일몰 투어를 일찍 마치고 내려오는 아쉬움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물론 숙소에 남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이야기도 있기는 했다. 우리 넷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고 그 배신감의 이야기는 이날 밤 뒤풀이 술자리 내내 계속되었다. 자유여행의 또 다른 에피소드를 하나 만든 셈이 되었다.
시그널 힐에서의 낙조 풍경. 점프샷까지 찍으며 여유롭게 일몰 풍경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폭풍우(?)를 뚫고 오른 테이블마운틴 등산 이야기,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기린과 코뿔소 이야기, 땡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오후 내내 걸으며 다닌 다크투어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배신 이야기 등이 안주가 되어 첫날 뒤풀이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오랜 기간 준비했던 아프리카 자유 여행의 본격적 첫날이어서 그런지 그간의 설렘이 현실이 되며 여러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내일 먼 거리를 이동해야 되는데 우버 택시를 이용해서 잘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나왔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우리끼리 웃으며 각자의 숙소로 되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온 직진님은 어제 담가 둔 막걸리를 체크했다. 남아공을 떠나기 전날까지는 잘 익어야 맛을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걱정과 함께. 그리고 어젯밤 소음 폭탄을 맞은 감독님은 이날부터 도사님과 짝을 이루었고 대신 직진님과 내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잠들기 전 내일에 대한 기대가 또 한껏 피어올랐다. 과연 말로만 듣던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 희망봉의 모습은 어떨까? 그 자리에 서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이런 생각과 설렘 속에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