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2020년 1월 27일 밤 9시경.
일행이 모두 인천국제공항에 모였다. 드디어 '자유를 찾아 떠나는 아프리카 자유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수하물을 부치고 일상적인 출국 절차를 밟았다. 휴대폰은 로밍을 하는 대신 현지에서 유심칩을 사기로 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인천공항의 면세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있었고 열려 있는 몇 군데에서 간단한 쇼핑들을 했다.
그 와중에 열혈님이 스타벅스를 물어물어 찾아가서 커피를 우리 일행 숫자만큼 사 왔다. 역시 열혈님은 배포가 크다. 그 커피는 유쾌님이 사 오신 블루베리 머핀이랑 궁합이 딱 맞았다. 21번 게이트 앞에서 출발 시각을 기다리며 간식으로 먹기에 딱이었다. 간식을 즐기며 휴대폰 사진의 여러 기능들을 발견하고 시험하며 시간을 보냈다. 라이브포커스 기능을 익혀 배경을 흐릿하게 날려 인물이 도드라지고 예쁘게 나오게도 해보고, 배경을 흑백으로 처리하고 원하는 부분만 컬러로 나오게도 해보며 고수님들의 스킬을 하수님들에게 전수했다. 하수들은 이런 기능들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탄식하며 여러 번 사진찍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감독님은 촬영 감독님답게 짐벌을 꺼내 휴대폰과 연결하고 영상 촬영을 한창 시험해보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휴대폰 사진 찍기 놀이를 하고 있으니 비행기 탑승 시작 안내가 나왔다.
2020년 1월 28일로 넘어가는 딱 그 시점에 비행기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항공 ET673편. 인천 공항을 출발해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공항까지 가는 비행기이다. 거기서 다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 공항까지 가는 비행기를 환승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가는 직항편은 없기 때문이었다. 4년 전에 쿠바로 갈 때 여행사에서 해준 항공 스케줄대로 움직이다 보니 30시간 정도가 걸렸었는데 이번에는 우리 스스로 항공편 예약을 하면서 환승 대기 시간을 많이 줄였다. 그래도 20시간이 넘는 머나먼 길이었다.
2020년 1월 28일 새벽 0시 20분.
다시 긴 시간 비행에 나섰다. 쿠바 갈 때는 북극항로를 통해 동쪽으로 비행하며 지구의 자전 방향대로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자전 방향을 거슬러 서쪽으로 적도를 향해 비행기가 날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그냥 제 자리에 떠 있기만 하면 지구 자전으로 서쪽 어딘가로 가는 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았다. 밤의 시간을 날아 시간을 거슬러 날아가는 비행기. 장거리 비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시간은 그저 인간이 설정해둔 개념에 불과한 듯한 느낌을 또 받는다. 날아가야 할 거리는 9200여 km, 시간은 약 12시간.
비행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안정화된 새벽 1시쯤. 첫번째 기내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새벽 시간에 기내식이라... 저녁까지 든든히 먹고 비행기 타기 전에 간식까지 챙겨 먹은 터라 별 기대가 없었다. 오히려 이 시간은 잠을 보충해야 할 시간이니까. 게다가 인천에서 출발하는 비행기임에도 우리가 탄 에티오피아 항공사의 이 비행기에는 한국인 승무원이 없었다. 정확히는 한국어를 하는 승무원이 없었다고 해야겠다. 하여튼 그래서 기내식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다. 승무원은 영어로 "치킨 오얼 피시"를 말했고 별 기대 없이 치킨을 선택했다. 그런데 막상 기내식 포장을 열어보니 반찬으로 김치가 있었다.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나거나 한국음식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더니 벌써 김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기내식 맛이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밤인지라 와인을 시켜 한 잔 해버렸다. 시차 적응에는 잠이 최고이니 잠을 푹 자보려고 시켰다. 천천히 김치에 곁들여 느끼한 치킨 기내식을 먹고 미리 준비해한 영화 한 편을 보고나니 시간은 이내 3시가 넘어버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내 비행 짝꿍인 감독님은 일찍이 뒤쪽 빈자리로 이동해서 잠을 청했다. 나도 자야겠다 하는 생각과 함께 깊은 밤 속으로 비행기 소음을 자장가 삼아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불현듯 잠에서 깼다. 시간은 11:10(한국시간). 11시간의 비행 끝에 창 밖으로 서서히 동이 터오기 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밤의 시간을 아무리 부지런히 달려도 지구의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는 건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나오는 기내식을 먹고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세계 어느 곳이든 일출의 장면을 본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더욱이 그것을 하늘 위에서 본다는 것은 지상의 모든 것을 덮은 구름 위에서 마치 내가 우주의 작은 존재임을 확인시켜주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구름 위에서 색의 스펙트럼을 펼쳐내는 자연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날이 조금씩 밝아오면서 비행기 창에 성에가 맺히고 얼음 결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는 겨울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아프리카의 땅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유리창에는 얼음이라니. 무언가 이 여행이 아이러니한 미스터리인 듯 신비감이 들었다. 마치 눈의 결정처럼 유리창을 가득 채웠던 성에는 비행기 고도가 낮아지면 서서히 녹아 사라져 갔다.
그런데 좌석 앞 모니터에 나오는 도착 예정 시간이 원래 시간보다 조금 늦어져 있었다. 이러면 최악의 경우 환승 비행기를 타지 못할 수도 있다. 나름 처음에 계획을 할 때 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약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게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었는데 도착이 늦어지면 그 시간이 확 줄어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슬슬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도착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환승 대기 시간을 줄인 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13:30(한국시간) 07:30(현지시간, 이후 현지시간 계속)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도착 시간이 예정보다 약 20분 정도 늦었다. 서둘러 환승하러 가야 했다. 환승 비행기는 08시 20분 출발 예정이다. 생전 처음 만난 공항에서 50분만에 환승 비행기를 찾아가야 하는 위기가 여행의 첫 시작 순간부터 나타난 것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공항은 생각보다 북적거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느긋이 즐길 수 있을 만큼 한산했다. 공항도 새로 지은 지 얼마 오래지 않았는지 깨끗해서 아침 공기처럼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여유를 즐길 새가 없었다. 자칫하면 환승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에 천장에 매달려있는 "transfer" 표지판만 보면서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꽤 긴 거리였고 중간에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기도 했다. 직원들이 중간에 티켓을 검사하기도 해서 약간의 지체도 있었다. 10명이나 되는 인원이 앞뒤에서 서로를 챙기며 부지런히 이동을 했다.
7시 55분경 우리가 탈 비행기 앞에 도착했다. 이 비행기는 보딩 타임은 7시 30분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 탑승을 했고 우리는 뒤따라 걸어오는 일행들을 재촉하며 부랴부랴 비행기 탑승을 마쳤다. 다행히도 길을 헤매지 않았고 물 한 모금 마실 새도 없이 부지런히 챙긴 덕분에 무사히 전원이 탑승에 성공했다. 에티오피아항공 ET847은 우리를 태운 지 얼마 안 되어 문을 닫고 활주로로 이동해 이륙했다. 이때 시간은 08:20!! 환승시간에 조금 더 여유를 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환승에 이렇게까지 짜릿한 스릴을 느낄 필요가 없으니까...
허겁지겁 환승하고 좌석에 앉아 이륙을 하고 나서 맥이 탁 풀리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꼬일 수 있는 위기를 잘 넘겼다는 안도감에 비행기 좌석에 파묻히듯 축 늘어졌다. 이제 케이프타운까지는 다시 6시간 이상 비행해야 한다. 예전 쿠바 여행 때의 긴 환승시간을 좀 줄여보고자 한 이 계획은 시간을 단축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기나긴 대기 시간에 지치는 것만큼 바쁜 환승에 또 그만큼 기력을 소진하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 허겁지겁 환승을 한 터라 피곤이 몰려들었고 이륙과 함께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워낙 비행기를 자주 타는 사람인지라 비행기 안에서 잠은 참 잘 자는 것 같다. 예민하지 않은 성격도 한 몫하는 것 같고...
몇 시간이 지나 잠을 깼고 그와 동시에 눈은 좌석 앞 모니터의 화면으로 향했다. 지도의 그래픽이 점점 케이프타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서서히 지구의 표면에 있는 지형지물들이 하나씩 인식될 만큼 거리가 가까워져 갔다. 먼 옛날 뱃사람들이 아프리카의 최남단을 지나며 케이프타운에 있는 테이블마운틴을 보며 대서양과 인도양의 기준점을 지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처럼 비행기에서도 그 테이블마운틴을 눈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다다랐음을 알게 되었다.
13시 30분경(케이프타운 현지 시각, 한국시간 20시 30분경)
드디어 우리 일행은 케이프타운 공항에 사뿐히 안착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약 20여 시간 만에 도착을 했다. 이번에 새로이 합류한 신입 회원들, 쿠바를 다녀온 회원들 모두 피곤한 모습이긴 하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기대감과 함께 생기가 있었다.
고대했던 아프리카 여행의 시작점에 무사히 도착했고 오후 여정을 가볍게 즐기고 내일부터 아프리카를 탐방한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모든 일정과 숙박, 교통까지 우리 손으로 모두 준비한 터라 그 설렘이 더욱 컸다. 몇몇 일행들은 우려와 걱정을 감추지 못했지만(특히 총무님이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인원도 늘었고 그만큼 준비하고 챙겨야 할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지난 쿠바 여행에서 얻은 자신감 때문인지 걱정보다는 기대감을 많이 갖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새로운 곳에 나를 던져 그곳에서 자유를 느껴보고 싶어 선택한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과 광활한 모래 사막과 웅장한 폭포와 대자연,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며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여행이 이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