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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롱 Oct 08. 2021

지독한 독일 겨울, 버티고 버티면 봄은 옵니다.

겨울 우울증을 극복하는 다섯 가지 방법

한 번의 겨울이라도 지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독일 겨울이 얼마나 우울하고 음침한지. 그 어두운 기운이 사람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드는지도.  여름이 채 가시기도 전인  9월 초 , 해가 짧아진다 싶으면 벌써 겨울이 코앞까지 와 있는 셈이다. 서머타임이 시작되는 3월 말이 되어도 좀처럼 물러날 생각을 않는 겨울. 끈질기고 지독하다. 그 긴 시간 동안, 오후 4시부터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하늘은 다음 날 아침 9시가 되어도 어둑어둑하다. 폴폴 날리는 눈은 구경하기 힘들고, 대신 두꺼운 안개가 자욱하게 세상을 뒤덮는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은 없지만, 좀처럼 가시지 않는 서늘한 기운은 뼛속 깊숙이 파고든다. 그 진한 냉기에 몸과 마음이 굳으면 꼼짝없이 우울함의 늪에서 갇혀버리고 만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왜 몸과 마음이 이리 축축 처지는지. 한 달에 한 번 걸리는 마법 때문인가 했다가, 벌써 노화가 시작되는 건가 싶었다. 설마 큰 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걱정이 되기도 했고.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밖으로 나가 일 벌이기는 더 좋아하는 전형적인 외향인 인데다가 체력 하나는 타고 났다고 자부하는 에너자이저인데… 이른 저녁부터 앓아눕듯 침대로 기어들어 갔고, 다음 날 아침에는 아이들 지각을 면할 마지노선이 돼서야 겨우 이부자리에서 기어 나왔다. 근면·성실을 최고 미덕으로 아는 나는 무기력한 스스로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고, 이러다가 복직은커녕 평생을 무지렁이로 사는 건 아닐까 불안해했다.  활기가 빠져나간 몸과 마음에 죄책감과 불안함이 가득 차오르면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울고 나면 속이라도 시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뭐가 부족하다고 징징거리니. 등 따시고 배부른데  죽는소리 하고 있네.’ 하는 훈계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혼자 울지도 못하니.’라는 변명인지 대답인지 모를 악에 받친 울부짖음도 들렸다. 나 왜 이러는거니?


그러다 언제부터인가는 토끼 같은 내 새끼들의 재롱에도 미소 한 번 짓기가 힘들어졌다.  ‘웃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야 무거운 입꼬리를 겨우 씰룩거릴까 말까… 또봇 조립해줘, 퍼즐 맞춰줘, 책 읽어줘. 시도 때도 없이 호출 버튼을 누르던 아이들은 각자 알아서 노는 시간이 길어졌고, 원래도 수다스럽지 않던 남편은 더 과묵해졌다.


‘‘아무래도 자기 겨울 우울증인 것 같아.‘‘


어느 날 무기력과 우울의 심해에 끝도 없이 빠져드는 나를 지켜보던 남편이 조심스레 말했다. 평생 우울증이라고는 모르고 살 줄 알았다. 계절을 타서 울적하다는 말은 의지박약 한 이들의 변명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무지하고 교만했던 나에게 겨울 우울증이란 말은 생경했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겨울 우울증에 대해 찾아보니, 무력감, 체중 증가, 과다수면, 단것에 대한 욕구 증가, 마치 동면하는 것 같은 대외 관계 및 사회적 단절 등 빠지는 것 하나 없이 모조리 다 내 이야기였다.  극지방(독일 라이프치히는 위도가 51도다)에 가까울수록  발생 확률이 높고,  20~30대 젊은 층 여성(독일에 처음 왔을 당시 35세였다)에게서 더욱 많이 관찰된다는 것까지도.


독일로 이사 오기 전, 햇빛 짱짱한 캘리포니아에 살았다. 축축하고 쌀쌀한 겨울은 딱 11월 중순부터 1월 중순까지. 핼러윈이 막 끝나고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새해로 이어지는 파티 릴레이와 딱 겹치는 시기이다.  즐거운 이벤트가 빼곡한 캘리포니아의 짧은 겨울은 떠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  반면 이곳의 겨울은 6개월 가까이 이어질 정도로 길고 지루하다. 그렇다고 나머지 6개월 동안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독일에 오고 나서부터 지독하게 겨울을 앓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당장 상담을 받고 싶을 정도로 내 상황은 절박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알아보는 곳마다 기본 3-4개월 정도 기다려야 하는 대기자 명단도 문제였지만, 한국어로 내 마음을 풀어낼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어정쩡한 독일어로 상담받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조여왔다. 그러다간 없던 병도 생길라. 어쩔 수 없이 인터넷에 나와 있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추려 나름의 처방전을 만들었다.  다 알고 있던  뻔한 이야기지만 매일 보고 의식적으로 실천해야겠다 싶었다. 반으로 자른 새하얀 A4용지에다 알록달록한 싸인펜으로 다섯 가지 규칙을 적어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우울함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처방전 하나, 비타민 D 챙겨 먹기: 햇빛으로 충전할 수 없으니, 먹어서라도 채워야 하는 비타민 D. 먹는 즉시 몸에 쏙쏙 흡수되는 게 아니라기에 반짝하고 해가 나는 한여름이 지나면 곧바로 고용량으로 챙겨 먹기 시작했다. 임신 기간에 엽산과 철분제를 챙긴 것을 제외하고는 영양제라고는 찾아본 적도 없었는데…긴긴 겨울 동안 내 몸 안에서 빛나고 있을 작은 태양을 만들기 위해 꼬박꼬박 먹기로.


처방전 둘, 해가 나면 열일 제쳐두고 햇볕 쬐기: 낮은 짧고, 밤은 길고, 안개와 구름은 두껍고. 이런 악조건 뚫고 햇살이 잠시 얼굴을 내 비출 때가 있다. 말 그대로 버선발로 맞이해야 할 반가운 손님. 해가 나면 열일 제쳐두고 햇볕을 쬐며 광합성하기로 했다. 우리집 작은 발코니도 좋고, 몇 발자국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공원이면 더 좋고. 금쪽같이 귀한 햇볕을 쬐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자연산 비타민 D가 몸 속 구석구석에서 퐁퐁 솟아나고, 눅눅했던 기분도 뽀송뽀송 마르는 느낌이랄까.


처방전 셋, SNS 멀리하기: 이건 전문가의 조언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나를 관찰해 본 결과 필요하다고 생각해 취한 조치. 일상에서 얻는 소확행의 순간을 SNS에 올리다 보면 친구들의 대확행이 담긴 사진을 보게 된다. 집을 사고,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럭셔리한 휴가를 즐기고… 남들은 대단하고 확실한 행복을 누리는데, 나만  쪼잔하고 쩨쩨한 행복 쪼가리를 겨우 쥐고 있는 것 같아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제곱, 세제곱, 아니 무한대로 증폭되는 우울함. 내 마음에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당분간 떨어져 있자, SNS.


처방전 넷, 규칙적인 일상 세우기: 무기력함을 한 번에 퇴치하기는 어려우니, 해내기 쉬운 작은 미션 여러 개를 일상 여기저기에 이정표처럼 심어두었다.  월수금 아침에는 아이들 등교시킨 후,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공원 세 바퀴 걷고 들어오기. 꽃 ‘화‘자를 쓰는 화요일은 마트나 시내 꽃집에 들러 예쁜 꽃을 사 오는 날. 목요일 오전에는 아너트 할머니 댁에 가서 독일어 회화 연습을 하고… 작은 이정표를 쫓아 걸으며 우울의 숲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처방전 다섯, 다정한 이들과의 맛있는 수다: 라면으로 위장을 가득 채우거나, 배가 고픈지도 모른 채 쫄쫄 굶거나 했던 불규칙한 식사패턴. 질 좋은 연료가 떨어졌으니 몸과 마음이 처지는 건 당연한 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밖으로 나가 제대로 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남편 하고는 연구소 구내식당에서 독일식 메뉴를 먹었고, ‘지요밍‘ 언니네 집에서는 식탁 가득 차려준 한식 밥상을  싹싹 비웠다. ‘이네‘랑은 빵 학교라고 불리는 동네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와 속이 두툼한 샌드위치를 먹었고. 다정한 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먹는 맛있는 음식은 좋은 연료가 되어 굳어있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줬다. 추운 겨울, 그 온기로 일주일 정도씩은 버틸 수 있었다.


처방전대로 한다고 갑자기 겨울이 행복의 시간으로 탈바꿈한 것 아니었다. 원망스럽게도 독일의 겨울은 여전히 지독하게 우울하고, 징그럽게 음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의 시간이 겨울로 기울 때면 다섯 가지 셀프 처방을 되뇌며 다짐한다. 비타민 D 잘 챙겨 먹고, 햇빛 많이 보고, SNS는 적당히 멀리하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다정한 사람들과 맛있는 것 먹으면서 잘 버텨보자고. 우울하고 무기력한 날도 있겠지만,  내 작은 노력이 모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주문을 건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봄은 반드시 오니까.  


이미지출처

https://unsplash.com/photos/KNUp-YBwB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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