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멜버른, 커피 향에 실려온 너의 내음.
멜버른을 떠올릴 때이면 나의 코 끝에는 언제나 신선한, 그윽한, 갓 갈려나온 황홀한 커피의 향이 맴돈다. 그 싱그러운 커피의 향을 있는 힘껏이고 크게 들이마시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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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버릇이 있었다. 썩 좋지는 못한 버릇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커피머신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리곤 커피를 내렸다. 진득하고 두둑한 한잔의 커피를 내렸다. 두유를 스팀했고 자그마한 아마도 알코올을 담는 글라스인 듯한 반짝이는 유리잔에 커피를 담았다. 한 모금 들이켜는 그 첫 순간의 코와 혀의 황홀함이란! 그렇게 아침을 먹지 않고 커피를 들이켜곤 했다. 그런 많은 아침들이면 함께했던 '너'와 함께, 아침을 먹지 않은 채 커피를 들이켜곤 했다.
너는 유럽에서 날아온 꼬마였다. 한때는 꼬마이던 너는 어느새 커다랗게 자라 있었다. 너의 나라가 아닌 호주에서 이만큼이나 자라 있었다. 너는 말했다. 동유럽의 여느 노부인이던 너의 할머니는 집에서 직접 커피콩을 볶아 커피를 내리곤 했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이면 온 부엌을 가득 매우던 그 향긋한 커피 냄새에 잠을 깨곤 했다고 했다. 그렇게 오래된 아침에 풍겨오던 커피의 향이 그립다고 했다.
아침에 맡는 갓 분쇄한, 갓 내린 커피의 향은 나에게는 '할머니의 향' 혹은 '고향의 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 그것은 '멜버른의 향'이었다. 그곳의 정든 '나의 집'의 향이었고 언제나 달콤하던 '너의 향'이었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이고 그윽한 커피의 향이 온 머리 속 가득하도록 진득함을 들이마실 때이면, 멜버른과 너를 떠올렸다.
우리의 오래된 버릇은 썩 좋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빈 속에 커피를 마시는 일. 한 잔이 아닌 연거푸 석 잔은 마시는 일. 그 바보 같은 버릇에 이따금의 우리는 느껴질 정도로 손을 덜덜 떨곤 했고 그 카페인의 충격에 우리는 뭐가 좋다고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곤 했다. 그렇게 빈 속에 커피만 세잔을 마셔내고 손이 떨린다고, Shaky 한 기분이 든다고 이야기하는 서로가 너무나 우스웠다. 그렇게 커피 세잔은 마치 주량과도 같이 나의 한계 커피량으로 판명이 났는데, 하루 석잔의 커피가 나의 한계치였다. 과도한 카페인 섭취는 소화불량을 야기하고 어쩌면 미세하게 온몸이 덜덜 떨리도록 만든다. 그렇게 나는 너와의 그 바보 같은 오래된 버릇으로 석잔의 커피를 알아냈다.
멜버른과 이탈리아는 오묘한 관계이다. 이탈리아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이탈리아에서 자부하는 최고의 타이틀들을 멜버른은 자꾸만 낚아채 오곤 했다. 멜버른의 커피는 세계 1위를 자랑했다. 엄밀히 말한다면 진득한 고유의 향을 가진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가 단연 최고이겠지만, 매끈하고 반짝이는 비단결 같은 우유 폼을 얹은 커피는 멜버른이 최고였다. 호주는 우리가 아는 커피 메뉴와는 약간은 다른 고유한 독자적인 메뉴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테면 '롱 블랙'이라거나 '플랫 화이트'라거나. 또한 주관적인 판단에 객관적임을 더하자면 세계 1등을 한 바리스타는 대부분 호주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멜버른은 '커피의 도시'였다. 이탈리아인들이 복장 터질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이탈리안 피자를 만드는 '세계 최고의 피자' 타이틀을 가진 요리사의 주방도 멜버른의 브런즈윅 지역에 있었다.
그렇게 멜버른에는 거대한 커피 로스터가 심심치 않게 동네마다 있었고, 어디에 있든 십분 거리 내로 최상의 커피를 내는 카페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멜버른에서 '멜버른의 커피'와 사랑에 빠졌고 그랬기에 너와의 매일 아침이면 우리 집에 놓인 자그마한 커피 그라인더로 열심히 커피콩을 갈아, 우리 집에 놓인 자그마한 커피머신으로 한잔의 커피를 내릴 수 있었다.
커피 그라인더에서 커피를 덜어낼 때에 그 까만 커피의 가루들이 새카만 잔재를 남기듯이,
오래된 아침이었다. 우리는 역시나 우리의 바보 같은 버릇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커피를 석 잔씩 즈음은 마셔내었고 씻지도 않은 꾀죄죄한 몰골로 라운지의 소파에 눕듯이 앉아있었다. 라운지의 소파는 일명 '껴안는 소파'로 그 무수한 세월 동안 안아내었던 무수한 사람들 만큼이나 움푹 파여 오늘에 앉는 나와 너를 포근하게 감싸 앉혔다. 그리고 우리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세계 여행에 나섰다. 우리의 투어가이드는 '구글 Earth'였다. 우리는 너의 고향과 나의 동네와 스페인과 파리와 유럽의 어딘가에 다녀왔다. 너는 멕시코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고 나는 내가 아는 유일한 멕시코의 도시였던 '멕시코 시티'를 찾아내어 너에게 보였다. 그리곤 우리는 너의 동생이 난로에 궁둥이를 데인 이야기, 어른들이 자꾸만 입으로 가져가던 담배꽁초를 입에 물었던 이야기, 마당의 커다란 체리나무에 뛰어오르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집 마당에서 수많은 홍시를 떨구던 감나무 이야기를 나눴다. 바로 그날이었을 것이다. 흔하디 흔한 '감'이란 과일의 영어가 'persimmon'이라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된 날이.
멜버른이 아프게도 그리워지는 날이면, 아니 어쩌면 네가 아리게도 그리워지는 날이면 나는 그윽한 향을 내뿜는 커피콩을 꺼내어 그라인더에 담고 가만히 갈아내었다. 그리곤 진한 한잔의 커피를 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아침, 텅 빈 나의 속으로 까만 커피를 들이붓곤 했다. 쓰라림은 없었다. 신선한, 그윽한, 황홀한 향기만이 나를 채웠고 그 멍청한 버릇으로 나는 너를 추억해냈다.
어쩌면 나는 멜버른 보다도 너를 아프게 그리워하는 지도 몰랐다. 여행을 안아 덮기보다 그 여행 안에서 만난 사람들을 안아 덮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언제나 그랬다. '삶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것들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랬다. 너와 만들어낸 그 지독하도록 황홀한 커피의 향이 나의 멜버른을 만들었고 오늘까지 이어져 나의 자그만 부엌에 커피 향을 가득히 채워냈다.
'여행'이 아니었다. 짧았지만 길었던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를 채운 '사람'이 있었다. 두고 온 그 그리운 얼굴이 나의 마음을 아련하게 만들었고, 새롭게 만들 그리운 얼굴을 그려보게 하여 나의 마음을 붕 뜨게 만든다. 나는 여전히 너의 잔재를 치워내지 못하고 가만히 흩뿌렸고 그 까만 그윽함을 끌어다 안아 덮고 누워 오늘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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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한잔의 커피와 네가 좋아하던 björk의 음악을 남긴다.
Björk - Black Lake
덧,
어쩌면 앞서 이어지는 글.
미드나잇 인 베를린. #2 https://brunch.co.kr/@sssori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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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한때의 나의 영원한 커피메이트.
너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