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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만세 Jul 18. 2021

제품에서 공간으로, 공간에서 브랜드로

진짜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졌다.

도쿄 출장에서 각자 찍은 사진을 합쳐 정리하던 도중, 나는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같은 공간을 함께 다닌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 사진만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시의 나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 한그루, 그중에도 잎사귀 하나에 엄청나게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부 콘텐츠에 지나친 관심을 쏟은 탓에 공간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맥락은 파악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들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는 그래픽, 디테일, 선 하나에 집착하는 일만 해와서 그런 거 아닐까..'

스스로 위로하는 한편, 한 번의 방문으로 공간을 기획한 사람들의 의도가 이렇지 않았을까, 척척 짐작하며 우리도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 연결시키고 발전시키는 동료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동료들의 사진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시선과 경험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됐다.


나도 다음에는 이런 것들을 좀 더 자세히 봐야지, 참고할 수 있게 찍어 둬야지..!


그때부터 좋은 공간에 가면 여러모로 '생각'이라는 걸 하며 사진을 찍었다. 이전에는 마음에 드는 것만 봤다면, 공간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 전시를 기획한 사람의 입장에, 동선을 설계한 사람의 입장에 서보고 그들의 고민을 간접적으로 이해해보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달까.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전시를 보러 가도 작품보다는 공간 구성과 동선, 전시 방식, 작품 설명을 어떻게 붙여놨는지 같은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게 됐다.



사진첩에 이런 것만 잔뜩 쌓임



새로운 영역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서 의도에 맞는 표현을 위한 다양한 제작 방식에 대해서도 많이 묻고 배울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내가 공간지각 능력이 떨어지는 2D형 인간이기 때문에 눈에 띄게 바뀌는 건 없었지만, 이후 공간 경험을 설계하거나 새로운 브랜드를 기획할 때 도움이 됐다. 특히 카카오프렌즈의 첫 플래그십을 준비하면서 이 모든 것을 써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플래그십 스토어 : 브랜드 정체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매장


2016년, 카카오프렌즈는 아직 플래그십 스토어가 없었다. 전 국민이 사용하는 메신저의 캐릭터답게 '전국 각지에서 대중과 만나는' 전략으로 주요 도시의 주요 백화점에 입점해 왔기 때문이다. 신촌에 처음 오픈한 팝업 스토어가 굉장한 관심을 모았고, 그 일을 본격적으로 해보겠다고 분사까지 했으니. 자, 이제 제대로 깃발을 꽂을 때가 온 것이다.

인기에 편승해서 흘러가는 트렌드가 아니라 오래오래 사랑받는 브랜드로 거듭나자고 구성원들 모두 한마음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 우리가 깃발을 꽂을 첫 번째 장소는 강남 한복판이었다.


2016년 6월 23일, 현장 뷰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공간 파트가 세명이라고 말했던가? 게다가 셋 중 한 명은 공간 초심자(바로 나)였으니..


당시 사무실은 밤 10시가 되면 불이 다 꺼졌다. 천장이 드높은 운동장 같은 임시 사무실에 불이 꺼지면 아르떼미떼 스탠드가 책상마다 불을 밝혔고, 그 불빛은 새벽 2-3시가 되도록 꺼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자리는 자르다 만 종이들과 이런저런 샘플이 시끄럽게 널려 있었다. 잔재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노트북을 디스플레이에 연결하고 앉으며 매일 생각했다. '오늘 집에 갈 수 있을까?' 첫 플래그십 오픈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활이 매일 계속됐다.


우리가 이 비싼 땅에
언제 이런 공간을 만들어 보겠어



팀의 리더인 힘은 우리가 이 비싼 땅에 언제 이런 공간을 만들어 보겠냐며, 인생에 다시없는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힘내자, 잘해보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아니 근데, 지금 이 순간도, 오늘 이 하루도 우리 인생에 다시없는 순간 아닌가요?"

거기다 대고 나는 이런 소리를 하는 팀원이었다. 힘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내 의지로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한 팀이지만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고, 셋이서 책임져야 하는 공간이 너무나도 (비싸고) 거대했다. 내가 오늘 이걸 만들지 않으면 오픈 때도 이게 없을 거라서.. 나는 최고의 브랜드 경험을 보여주겠다는 마음보다는 구멍을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 와중에 힘 생파


공간 초심자로 팀에 합류해 POP 하나에도 쩔쩔매며 괴로워하는 나에게 언젠가 힘이 이런 말을 해줬다.

"윤 자신이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니라 공간의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안 그러면 같은 고민을 계속하게 될 거고, 누구를 설득하는 것도 어려울 거야."


그때 그 말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아마 힘은 모를 것이다. 이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의 나는 매우 속상했지만, 한편으로는 굳은 결의를 다지게 됐다. 이 세명뿐인 팀에서, 어느 한 부분만큼이라도, 내가 제일 많이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래서 나도 팀에 꼭 필요한 하나의 기둥으로 존재하고 말겠다는 결심 같은 것이었다.

'내 역할에 책임지고 싶다, 동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좌) 동료들의 사랑, (우) 나의 튜브 사랑


내가 유독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잘 받아서일까.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하느냐에 따라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내가 어떤 사람들과 일하고 싶은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졌다.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생각할 필요조차 못 느끼던 것들이었다.


강남 플래그십 오픈 전날, 모든 준비를 마친 새벽


결국 나는 동료라는 말이 좋다. 친구 같으면서도 같은 목표를 향해있고, 어려움을 함께 겪으면서 힘든 시간들을 서로 지탱해주는, co-worker라는 어감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같이 일하는 사람 이상의 느낌적인 느낌.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을 때에도 내가 나를 붙잡았던 가장 큰 이유는 함께하던 동료들이었다. 동료들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정말 컸고, 그 마음이 나를 더 노력하게 했다.


혼자 일하는  제일 편한 줄로만 알던 나는 좋은 동료들과 함께 하면서 좋은 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일을  잘하고 싶어 졌고, 그저 ' 잘하는 사람'보다는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 되고 싶어졌다.  일을 좋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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